‘Eased Landscape: Where is My Home?’ 시리즈 앞에 선 조선희 작가.
지하에 설치한 안형준의 ‘텐트’. 텐트 안에 들어서면 소리와 향을 체험할 수 있다.
2024년 11월 말, 서울 영동대교 북단 대로변의 낡은 건물 앞에서 고소한 냄새가 솔솔 풍겼다. 냄새의 근원지는 ‘양평기절호떡’이라는 이름의 포장마차. 먹음직스러운 견과류 호떡이 지글지글 익고 있었다. 양평 오일장의 명물이 성수동에 등장한 까닭은 무엇일까. 오래된 건물에서 열린 전시를 위해서였다. 11월 14일부터 30일까지 진행된 그룹전 <지PPP>의 한 섹션으로 참여한 것이다.
슬쩍 보아도 연식이 느껴지는 건물은 1975년 완공되어 최근까지 노래방과 수제화 공방 등으로 운영됐다. 집기는 모두 철거했지만 시간의 더께가 끈적하게 달라붙은 공간에 13명의 다양한 작가가 저마다의 ‘집’을 풀어놓았다. <지PPP>라는 제목은 ‘집’의 받침을 ‘ㅂ’ 대신 ‘P’로 쓴 조선희의 아이디어에서 출발했다. 논의 끝에 검색의 편의를 위해 나란히 쓰기로 결정했다고. 공간이라는 주제 아래 사람들이 모여 즐기는 전시니 ‘Place, People, Play’라는 부제가 뒤따른다. 전시에는 사진가 조선희와 건축가 조병규를 중심으로 아티스트 강숙, 김마저, 박예지, 아누타, 사진가 안형준, 건축가 모승민, 유승종, 이승호, 조한재, 최민욱, 허병욱이 함께했다. 서로 분야가 다른 만큼 집을 바라보는 관점도 상이했다. 시간이 멈춘 듯한 건물에서 13개의 집을 오가다 보니 유쾌한 감각적 충돌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이번 전시는 건물을 매입한 조선희 작가가 리모델링을 맡은 조병규 건축가와 대화를 나누던 중 싹을 틔웠다. “고등학교 동창의 남편이 조병규 건축가다. 리뉴얼에 대해 이야기하다 그가 이왕 빈 건물인데 전시회라도 하는 게 어떠냐고 지나가듯 말했다. ‘좋은 생각인데?’ 싶었다. 처음에는 세 명이 얘기를 시작하다 점점 숫자가 늘었다. 강숙 작가가 기억하길 자신이 9월 2일에 합류했다고 하더라. 그때부터 제대로 준비를 시작했다.” 아이디어는 두 사람의 대화에서 피어났지만, 특정 기획자가 주도한 전시는 아니다. 모든 작가가 자유롭게 의견을 펼쳤다. “다 같이 모여 각자 전시하고 싶은 자리를 정했다. 나는 모두 정하고 남은 위치를 받았다. 집주인이 선점하면 안 되니까.” 자유롭게 자리를 지정했으나 흥미롭게도 같은 분야끼리 뭉치지 않았다. 설치미술과 드로잉, 건축이 한 전시실에서 대비되며 독특한 심상을 자아냈다. 이를 두고 놀라운 우연의 산물이라고 하자 작가는 정정했다. 우연이라기보다 ‘자유로움의 선물’이라고.
1 강숙 작가의 ‘1988년 고향 찻집에서 발견한 바로 그 촛농 기둥’. 2 조한재 건축가가 꾸민 ‘건축가의 선반’. 3 최민욱 건축가의 ‘협소주택 세로로’. 건축가가 거주하는 실제 주택의 모형과 사진을 전시했다. 4 시인이기도 한 조병규 건축가의 ‘시로 그리는 집’. 관람객들이 원고지 위에 방명록을 남겨 참여 작품으로 거듭났다. 5 이전에 노래방이었던 지하에서 포착한 조선희 작가와 그의 작품.
하늘 아래 같은 집은 없다
전시는 지하부터 3층까지 건물 전체에 드넓게 펼쳐졌다. 지하에는 사진가이자 텐트 메이커 안형준이 ‘집 안의 집’을 표현한 텐트와 황량한 벌판 위 색색의 집을 포착한 조선희의 사진 작품이 전시됐다. 인도와 맞닿은 1층에는 조선희의 연작과 함께 굳은 촛농 조각이 있었다. 이는 작가 강숙의 ‘1988년 고향 찻집에서 발견한 바로 그 촛농 기둥’으로, 건물이 지나온 세월을 향한 경의를 담아 전시 한 달 전부터 매일 초를 쌓고 녹이는 과정을 반복해 완성했다. 시간을 응축한 이 작품은 전시 종료 후 ‘파괴식’ 퍼포먼스를 통해 해체되었다. 성수동에 터를 잡은 건축가 조한재는 자신의 작업실을 그대로 옮겼다. 외부에 공개되지 않은 미완성작 모형도 전시했는데, 이는 드러나지 않은 작업을 공개함으로써 전통적으로 ‘만드는 자’의 지역이었던 성수동과의 연결 고리를 찾기 위함이다.
건축가 이승호는 나무 대문의 양 문을 떨어뜨려 배치한 뒤 한지로 연결한 설치 작품을 선보였다. 대문에 아로새겨진 자연의 선과 인간이 한지에 그은 선이 종과 횡으로 기묘한 긴장을 일으켰다. 3층은 작품의 대비가 더욱 돋보였다. 철을 용접하는 조각가 박예지는 작품 ‘갈대’ 시리즈로 갈대밭의 일부를 옮겨왔다. 유연하게 굽은 조각은 얼핏 가냘파 보이지만 긴 줄기를 지지대 삼아 꼿꼿이 서 있다. 부드럽게 어우러지는 갈대처럼 서로를 받아들이길 바라는 마음을 담았다고. 반대편 전시실에는 시를 쓴 원고지로 벽을 도배한 조병규의 작업, 건축가 겸 조경가인 유승종의 비 내리는 정원, 그리고 개미가 사는 섬을 가구이자 조형으로 표현한 김마저의 설치 작품이 각기 존재감을 드러냈다. 안쪽 벽 너머에는 건축가 허병욱의 공간이 나타나는데, 병원이나 연구소를 연상시키는 흰 바탕에 격자무늬로 채웠다. 늘 공간의 치수를 고민하는 건축가의 일을 시각화한 작업이다. 작품을 모두 둘러보니 조선희의 말처럼 같은 방식으로 집을 이해한 사람이 없다. “이러한 그룹 전시는 처음인데 재미있었다. 여러 사람이 모였지만 한 방향으로 갈 이유가 없기에 더 다채로운 전시가 완성된 것 같다. 예술을 통해 자기 생각을 드러낼 때 특정한 형식에 얽매일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이번 기회에 다시 한번 깨달았다.”
6 허병욱 건축가의 ‘디멘전展’. 벽에는 평균 키, 눈높이, 어깨높이 등 건축가가 고려해야 할 각종 치수가 기입되어 있다. 7 철을 쌓아 올려 풀을 조각한 박예지 작가의 ‘갈대’. 8 김마저 작가의 ‘개미섬’. 오방색 실로 표현한 정원 위에 개미 형태의 책장을 배치했다.
존재하는 동시에 존재하지 않는
멀리 지평선이 보이는 메마른 땅에 네모난 집이 서 있다. 컴퓨터 바탕화면처럼 짙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집들은 알록달록한 원색을 뽐낸다. 비현실적인 풍경은 언뜻 환상의 세계처럼 보인다. 조선희의 ‘Eased Landscape: Where is My Home?’ 시리즈 속 집은 ‘작은 가게가 딸린 집’이다. 유독 이 같은 집 사진이 많다는 사실을 발견한 작가는 이를 연작으로 발전시켰다. “콘셉트가 정해진 건 2023년 10월경이다. 유니세프와 함께 케냐 북서쪽 트루카나 지역에 갔다. 몇 년 동안 비가 내리지 않은 지역에 봉사 활동을 하기 위해서였다. 자동차로 이동했는데 인접 국가 수단의 전쟁 상황 때문에 내리지 못하게 하더라. 핑크색 집을 꼭 찍어야겠다 싶어 잠시 멈춰달라고 한 뒤 창문을 내리고 빠르게 집들을 찍었다. 12일 동안 다니면서 집만 1만 장 정도 촬영했다.” 작가는 작품 설명에 이렇게 썼다. “집은 나에게 열네 살에 잃은 ‘아빠’다. … 나는 그것이 나의 노스탤지어임을 깨달았다. 존재하나 존재하지 않는, 아빠가 있을, 집들을 나는 하나씩 지었다.” 그는 집의 주변 요소를 후반 작업으로 지우고 평면적으로 완성했다. 꿈에서나 볼 법한 환상의 집처럼, 작가가 뒤늦게 깨달은 바에 의하면 영화 <바그다드 카페> 속 풍경처럼.
작품은 반짝이는 광택 인화지에 출력해 황금빛 빈티지 액자에 담았다. 가까이서 들여다보면 종이 표면이 금속 같은 질감으로 빛난다. “빈티지 액자를 활용한 건 일종의 퍼포먼스다. 화려한 액자는 오래전부터 모았고, 검정 프레임 액자는 2013년 전시 때 사용한 것을 재활용했다. 시간성이 중요한 시리즈이기 때문이다. 아빠가 존재했던 시점, 내가 핑크색 집을 찍은 시점, 한국에 돌아와서 작업한 시점, 그리고 전시에서 관람객이 집을 바라보는 시점까지 시간이 다르지 않나. 과거, 현재, 미래가 실은 일직선상에 있지 않을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싶었다.” 작품에서 가장 중요한 개념은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것’이라고 작가는 말했다. 사진은 ‘그것이 존재했다’는 사실을 증명한다는 롤랑 바르트의 이론을 인용하며 설명을 이어갔다. “아빠가 존재했지만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다. 사진 속 집과 땅, 하늘은 존재했지만, 내가 주변을 지운 풍경은 존재하지 않는다. 둘은 서로 맞닿아 있다. 집이 아빠로 대체된 것이다.”
반듯하게 정면을 향한 집의 앞면을 한참 바라보자 꼭 얼굴을 마주하는 듯했다. 보는 것을 넘어 눈을 맞추고 있다는 느낌에 쉬이 눈길을 돌릴 수 없었다. 인물 사진에서 무엇보다 모델의 눈빛이 중요하다고 강조해온 사진가는 건물의 눈빛을 읽은 것일까. “사람을 찍을 때 그 사람이 내 카메라, 곧 나를 응시한다. 사물도 마찬가지다. 내가 카메라를 통해 집을 바라볼 때 집도 나를 바라보고 있다. 지나칠 수도 있는 광경이지만 훅 이끌린 것은 서로 응시한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조우의 순간에 대해 말로 표현하기 어렵다고 말했지만 누구나 한 번쯤 경험했을 것이다. 사물의 시선에 걸려 넘어질 때를, 강렬한 이끌림에 대상을 응시하고 마는 순간을. 그 마주침의 순간을 사진가의 카메라는 포착한다.
전시를 끝낸 조선희는 다음 단계를 고민한다. 리모델링이 마무리되면 스튜디오도 이 건물로 옮길 계획이다. 더 먼 미래에 대한 아이디어도 무궁무진하다. “나 역시 사진 업계의 수혜자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이 유산을 다음 세대에게 잘 물려줄 방법을 고민 중이다. 젊은 세대를 위해 무언가를 하고 싶다. 사진 학교나 사진 상을 만들면 어떨까, 여러 방안을 생각한다. 고민하다 보면 어떤 형태로든 나올 것이다.” 2025년의 반가운 소식도 있다. 공사가 끝난 뒤 <지PPP>의 멤버와 다시 한번 전시를 열 예정이라고. “올드한 공간에서 전시했으니 새 공간에서도 해야 하지 않겠나.” 묵은때를 벗겨낸 건물에 들어선 13개의 ‘집’은 어떤 모습으로 비칠까? 전시가 어떻게 펼쳐지든 기대감과 희망이 넘실대리라는 것만은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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