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처음 소설을 써야겠다는 마음을 가진 건 1989년 존F. 케네디 국제공항에서 한국으로 오는 비행기를 기다릴 때였다. 열 시간이 넘는 비행을 앞두고 서점에서 책을 둘러보다가 그의 눈에 제목 하나가 훅 들어왔다. ‘Time to Kill’. 미국의 소설가 존 그리샴의 첫 번째 책이었다. 그리샴은 법정 소설을 써서 상업적으로 큰 성공을 거둔 변호사였다. 책은 무척 재미있었다. 차인표는 생각했다. ‘야, 변호사가 소설을 쓸 수 있으면 나도 쓸 수 있겠다.’
그로부터 20년 뒤, 그는 첫 책을 냈다. ‘배우’에 ‘작가’라는 수식어가 하나 더 붙었다. 그러나 ‘대중 연예인으로 먹고 산’ 세월이 있어서일까, 사람들은 그를 작가로 순순히 인정해 주지 않았다. 이제는 베스트셀러가 된 『언젠가 우리가 같은 별을 바라본다면』의 전신인 그의 첫 소설 『잘 가요, 언덕』이 나왔을 때, 서점은 아이돌 사진을 파는 매대에서 메이크업 제품과 함께 ‘스타가 쓴 책’이라며 그의 책을 홍보했다. 독자들이 바라보는 시각도 비슷했다. 책 출간 인터뷰를 해도 “부부 싸움해요?”, “다음 드라마 뭐 할 거예요?” 같은 걸 물었다고. 그는 깨달았다, 말은 아무런 힘이 없다는 걸. 오직 세월을 통과한 꾸준함만이 자신을 증명할 수 있으리란 걸.
이제는 세 권, (개정증보판까지 합하면) 다섯 권의 책을 낸 15년 차 작가, 차인표를 만나 그가 책을 통해 하고 싶었던 이야기를 구체적으로 들어보았다.
Q. 2011년 출간한 『오늘 예보』를 이번에 『그들의 하루』라는 제목의 개정증보판으로 냈어요.
그땐 세 인물의 하루를 담은 내용으로 출간했는데 책이 잘 안돼서 절판됐어요. 그러다 제 첫 번째 소설 『언젠가 우리가 같은 별을 바라본다면』이 베스트셀러에 올라 화제가 되면서 저의 다른 책을 찾는 분들이 생겼어요. 출판사 중에서도 이 책을 복간하고 싶어 하는 곳들이 있었고요. 이번 기회에 한 인물을 추가해 못다 한 이야기를 풀어냈습니다.
Q. 『그들의 하루』와 『오늘 예보』 사이에는 13년이라는 시간이 있습니다.
저에게는 이 책이 그래서 의미가 있어요. 세 명은 과거의 제가 쓴 사람들이고 마지막 한 명은 현재의 제가 쓴 사람이잖아요. 그런데 그 13년이라는 기간 동안 제 삶에도 많은 일들이 있었을 거 아니에요? 인간이 보편적으로 겪는 희로애락이 다 있었죠. 누군가를 가슴 아프게 떠나보내기도 하고, 울고 웃던 날들을 지나면서 예전에 했던 생각과 삶을 바라보는 지금의 생각이 큰 틀에서 벗어나지 않았는지 스스로 검증해 보는 기회였어요.
Q. 이번 소설에서는 어떤 점을 가장 신경 쓰셨나요?
처음에는 소설이 아닌 영화 대본으로 생각하고 써서 표현들이 좀 거칠었어요. 이번에는 너무 거친 표현들은 좀 순화했습니다. 사실 가장 신경 쓴 부분은 새로 추가된 네 번째 인물이죠. 미래에 만들어진 이 인물이 과거에 만들어졌던 인물들과 하루에 만나고 섞이게 되잖아요. 이들을 조화롭게 잘 융합시키는 것이 글을 쓰면서 가장 신경 썼던 부분입니다.
Q. 소설은 ‘그들’의 하루를 담고 있지만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이야기라고 생각하는데요. 최근 고립·은둔 청년 문제가 사회적으로 대두됐습니다. 청년들이 사회에 나오려면 어떤 도움이 필요할까요?
사회가 어떤 도움을 줘야 하는지 구체적으로 말은 못 하겠어요. 사람마다 각자 사정이 다르기도 하고요. 그러나 우리 사회가 할 수 있는 일, 누구든지 할 수 있는 일은 있는 것 같아요. 경쟁과 순위에 목매게 하지 않는 것이죠. 이런 것들 때문에 사람들은 내일을 생각할 때 걱정과 불안, 염려하는 마음이 먼저 들거든요. 그런데 내일은 인간의 영역이 아니잖아요. 내가 내일 살아있을지도 모르는데, 미래를 생각하면서 자꾸 걱정하게 만드는 것이 지금 우리가, 고립·은둔 청년뿐만 아니라 안 그런 척하고 있는 모두가 겪고 있는 똑같은 고통이라고 생각해요. 우리 모두 틀에 박힌 세상에 태어났지만, 사회 전반적인 분위기가 ‘오늘 하루에 집중해라’, ‘오늘 하루는 우리에게 있다’가 된다면 희망이 있지 않을까요. 그것을 끊임없이 깨우쳐 주는 것이 문화의 역할이라고 믿고요.
(그는 이 주제에 대해 평소 많은 생각을 해온 듯 말을 이어갔다.) “사람들은 미래가 두렵고 무서워서 자꾸 은둔하게 되지만 그게 아니에요. 우리가 사는 것은 현재고 현재는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있죠. 오늘 하루를 사는 ‘삶’에 집중하도록 하는 것, 그게 우리 사회가 구성원들에게 바라보게 해야 할 궁극적인 방향이 아닐까 합니다.”
그의 하루에 관해 물었다. 그가 매일 반복하는 일이 있다고 한다. 아침에 일어나 창문을 열고, 오늘 일어날 일들을 생각하면서, 오늘 만날 사람들에게 최선을 다하겠다고 다짐하는 것. 오늘의 인터뷰가 인생 마지막 인터뷰인 것처럼 온 힘을 다해 진실을 말하자고 스스로 주문을 거는 것. 누군가를 만나면 친절하게 대하는 것. 그는 다시 강조한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오늘 하루에 충실한 것이에요.”
Q. 작가님께 ‘하루’는 어떤 의미인가요?
‘도전’이에요. 제가 말하는 도전은 뭘 더 성취하고 경쟁하는 게 아니에요. 틀에 박힌 오늘 하루 속에서 내가 품고 있는 가능성, 그것을 끌어내는 싸움을 하는 거죠. 사람은 대부분 비슷한 시간에 일어나 비슷한 일상을 보내고 비슷한 사람을 만나다 비슷한 시간에 잠들어요. 그래서 사람들이 영화를 보거나 여행을 하면서 한 번씩 대리만족하잖아요. 잠시 내가 있던 틀에서 벗어나 자유로워지고 설렘을 느껴보는 거죠. 그런데 저는 그 설렘을, 도전을 통해서 느끼는 게 궁극적으로 가장 자유로워지는 일이라고 생각해요. 내가 가진 틀에서 벗어나서 생각하는 도전을 해보면 거기서 느끼는 기쁨이 있어요. 저 같은 경우 글쓰기나 독서가 그렇죠.
Q. 도전과 독서를 연결하다니 신선합니다.
사람이 자기 틀에서 벗어나려면 결국 다른 사람의 틀에 들어가 봐야 하잖아요. 독서를 통해 저자는 무슨 사유를 했는지 공감할 수 있는 사람은 굉장히 다양한 경험을 할 수 있는 거죠. 저는 그래서 독서가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독서가 우리에게 다른 사람의 틀에 들어가서 생각하고 공감할 기회를 주는, 그러니까 다른 세계를 열어주는 문이라고 생각하거든요.
Q. 작품은 작가의 삶을 반영하기도 하죠. 그런데 소설 속에는 노숙자, 공익 근무 요원 등 ‘저자’이자 ‘배우’라는 화려한 삶과는 거리가 있는 인물들이 등장해요.
저에 대한 편견이 있어요. ‘금수저’라는 것이죠. 아니에요. 가짜 뉴스거든요. 제가 13살 때 부모님이 이혼하셨어요. 아버지는 새 가정을 꾸리셨고요. 그때가 1980년대입니다. 당시 중년 여성이 아들 셋을 데리고 살던 동네에서 계속 산다는 건… 낙오자가 되는 거였어요. 사회적 편견이 심했죠. 이혼 가정으로 틀에 박힌 삶을 살 수밖에 없었는데 어머니가 그런 삶에서 벗어나고자 저희를 데리고 미국으로 갔어요. 저는 미국에 가는 순간 가장이 됐어요. 그때, 20살부터 25살까지가 제 삶에서 제일 가난했던 시절이에요. 무엇보다 제일 힘들었던 건 내일이 안 보인다는 거였어요. 낮에는 학교 다니고 밤에는 일하고 주말에는 아르바이트해서 학비 내고 남은 건 어머니 생활비 드리고. 페인트칠도 하고 사립 정신병원에서 간호보조원도 한 2년 하고, 편의점 알바며… 닥치는 대로 일했죠.
Q. 정말 부지런히 사셨네요. 그때의 경험이 소설을 쓰는 데 영향을 미쳤나요?
네, 그때 너무나 다양한 사람들을 만났어요. 그 사람들 하나하나 다 사정이 있고 가족이 있고 마음속에 아픔도 있다는 걸 알게 됐어요. 각자가 삶이라는 거대한 스토리를 만들어가는 창작자들이구나, 그런 생각을 했던 것 같아요. 그때 만났던 사람들이 제가 다른 사람의 아픔에 공감하게 하는 마음을 심어준 게 아닌가, 그 마음이 평생 나무처럼 자라나면서 제가 하는 어떤 선택의 기준이 되어주었고, 그게 또 소설로도 나오게 된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요. 사람들이 물어보거든요. “야, 너는 잘 살았는데 왜 노숙자 얘기를 해. 네가 뭘 안다고.” 그런데 제가 살아온 삶이 오히려 그런 분들의 사정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는 삶이었던 것 같아요. 작가가 결국 작품을 통해서 하고자 하는 건 자신을 드러내는 거거든요. 이번 작품이 저를 드러내는 매개가 되고 있다고 생각해요.
Q. 창작할 때 어떤 점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나요?
공감하는 마음이요. 그 마음을 저는 글쓰기로 표출하는 거고, 어떤 사람은 노래로, 또 어떤 사람은 무용으로 표출하는 거겠죠. 만약 아무도 이해하지 못하는 난해한 글을 써서 나 혼자만 감정을 표출한다면 그게 과연 일생을 바쳐서 할 만한 일일까? 저는 의문이 생길 것 같아요. 그런 의미에서 책을 쓸 때 두 가지 확고한 규칙을 갖고 있어요. 첫째로는 초등학교 5학년 이상이면 읽을 수 있는 쉬운 글을 쓰자. 두 번째는 빨리 읽히는 걸 쓰자. 제가 영화, 드라마를 오래 하다 보니까 지루한 걸 잘 못 참아요. 한 3시간 이내, 길면 4시간 안에 집중하면 끝낼 수 있는, 아무나 읽을 수 있는 소설을 쓰자는 게 지금까지 저의 목표에요.
Q. 그동안 소설을 통해 꾸준히 ‘생명 존중’에 관한 이야기를 해온 것 같아요. 작가로서 앞으로도 그 주제에 천착하고 싶은지 아니면 전달하고 싶은 다른 메시지가 있는지 궁금합니다.
그동안 저의 본성이 이끄는 대로 써왔기 때문에 앞으로도 마음이 가는 대로 쓰게 될 거라 생각해요. 먼 훗날, 한 10권 이상 나온다면 그때 사람들이 판단하겠죠. ‘이 사람의 책들은 결국 한 줄기에서 나왔구나', 아니면 '이것저것 옮겨 다니며 다루었구나’ 하고요.
Q. 차기작에 대한 구상이 있나요?
시작해 놓은 게 서너 개 있는데요. 요즘은 도서관에 관해 쓰고 있어요. 우리나라의 행정구역상 동이 약 3,500개 있는데 사립, 국립, 작은 도서관을 합쳐서 도서관 숫자가 3,500개에서 4천 개, 그리고 공원 숫자가 4천 개 정도 되더라고요. 결국은 동네마다 도서관 하나, 공원이 하나 있어요. 그런데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모든 현인이 ‘심신을 수련해라’라고 했단 말이죠. 결국은 공원 가서 운동하고 도서관 가서 책 읽을 수 있게 국가가 최소한 ‘이건 해줄게’ 하고 만들어 둔 게 아닌가 싶어요. 저도 도서관에 가서 글을 쓰는데요. 가보니까 요즘 한강 작가님 덕분인지 글 쓰는 사람들이 참 많더라고요. 모두 다 작은 소망이든 욕망이든 뭔가를 가지고 도서관에 오는 거잖아요. 그 사람들은 어떤 생각들을 가지고 오고 나와의 연결점은 뭔지, 그런 것에 관해서 소설로 써보고 있어요.
Q. 작가이자 인간 차인표의 최종적인 꿈은 뭔가요?
작가로서는, 1년에 한 편 정도씩 꾸준히 출간할 수 있으면 제일 행복할 것 같아요. 출간하려면 일단 써야 되잖아요. 1년에 한 편씩 쓸 수 있을 만큼 계속 공감하는 능력이 마음에 남아 있고 삶 속에 여유가 있는 상태가 됐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독자들을 실망시키지 않아야 계속 쓸 수 있으니까 재미있게 쓰고 싶은 꿈이 있고요. 인간으로서의 꿈은 특별하게 가진 게 없어요. 그냥 하루하루 만나는 사람들에게 최선을 다하면서 사는 게 제 목표예요.
Q. 마지막으로 독서신문 독자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요.
한강 작가님이 노벨문학상을 받아서 우리나라 문화에 경사가 났잖아요. 이렇게 된 데엔 문학을 계속 해 오신 앞선 작가들이 계셨고 그분들이 계실 수 있었던 궁극적인 이유는 독자들이 있었기 때문이에요. 우리 독자들이 우리 문학을 읽어주고 기다려 주고 평해주고 사랑해 주었기 때문에 결국 독자들이 우리나라의 문학을 떠받치는 기둥이자 주인이라는 생각을 해요. 저도 소설을 쓰는 사람으로서 독자 여러분들 한 분 한 분이 너무나 소중하고 감사하고요. 이르게 새해 인사를 드린다면 새해 한 분 한 분 모두를 축복한다고 얘기하고 싶어요.
[독서신문 이자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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