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매거진=MIA 작가] 아직 추웠던 봄, 예정보다 조금 일찍 일정을 마치고 귀가하는 길에 문득 올려다본 하늘이 연보라색이었던 어느 날. 그날은 새로운 작업의 키워드를 처음 발견한 날이기도 했다.
나는 집에 들어와 짐을 내려놓고 책상에 앉아 탁상 조명의 ‘ON’ 버튼을 눌렀다. 조명이 공간을 밝힐 때, 그동안 비슷한 시각에 비슷한 장소에서 습관처럼 보았던 하늘의 몇 가지 인상들이 순식간에 스쳐 지나갔다. 그리고 특정한 행위-조명을 켜는-를 통로로 한꺼번에 떠오른, 무의식 속에 남겨진 그러한 장면들은 하나도 같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색도, 모양도, 분위기도.
촉발된 기억은 의문을 낳았다. 하늘의 변화는 자연스러운 반면, 어떤 변화를 그렇지 못하게 느끼는 이유는 뭘까. 가령 신념이나 관계처럼 변화하면 유독 부자연스럽게 다가오는 것들은 왜.
그리고 반대급부의 생각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무언갈 영원히 따라가거나 사랑할 수 있다고 여겼던 믿음이 얇아지는 현상도 ‘그저 그럴 수 있는 일’이라 여길 수 있다면. 굳게 가졌던 신념을 버리는 일 마저 마치 ‘딸깍’ 버튼을 눌러 빛과 어둠을 만드는 일처럼 간단할지도 모른다는 가정을 시작하기. 이것이 세 번째 그림책, ‘나는, 이제’가 출발한 최초의 아이디어였다.
‘약하고 불안한 마음의 지반을 합리화하자는 건가’는 고민을 하지 않은 건 아니다. 하지만 어떤 생각이든 시각 표현은 멋스러운 결론 내리는 행위를 지연한다는 전제하에 가능한 것이므로, 이렇게 판단하기 시작하면 그림은 그려질 수 없을 것이므로, 검증하기 전에 사진을 찍고 그림을 그리고, 이미지를 따라가 보자고 결정했다. 그래서인지 작업을 다 끝마치고 보니 이번에 만든 그림책은 마지막 장을 덮어도 계속 질문하는 책이 된 것 같은 기분을 지울 수 없다. 하늘이든 마음이든 신념이든, 모든 변화가 실은 아주 자연스러운 게 아닌지, 일어날 일은 일어나게 되는 사실을 인정, 인정, 이해하는 일은 이런 게 아닌지.
그간 몇 번의 작업이 알려준 건, 내용의 논리적 구조를 다듬는 데 시간을 들이는 게 별 의미가 없다는 사실이었기 때문에, 이번에는 막연히 그림을 그리고 더미를 만드는 데 더 집중하려고 했다. 아이디어는 가지고 있는 채로, 나머지는 손이 움직이는 과정에서 구체적으로 해결해보자는 심산이었다.
다행히 책이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요소들은 하나씩 제 자리를 찾아갔다. (‘제 자리를 찾아간다’라는 말은 이 글을 쓰기 전까지 생각해 보지 못했었는데, 작업 과정을 묘사할 수 있는 꽤 마땅한 표현 같다.) 예를 들면 기획 초기 단계에서 실내와 실외를 표현하는 면적이 원래는 같았지만, 작업을 진행하며 실내 풍경은 실외보다 더 작은 면적에 놓는 방향으로 수정했다. 그리고 몇 번의 테스트를 통해 두 공간은 서로 다른 색으로 칠하게 되었다. 이 과정을 겪은 덕분인지 최근에 이 책을 처음 선보인 어느 북페어에서 몇몇 사람들이 “왜 하늘은 실내와 달리 모노톤이냐”고 질문했을 때, ‘더미를 진행해 본 결과 가장 나은 결과였으며 실내만 화려한 양상이 인물의 감정을 대변한다’는 설명을 덧붙일 수 있었다.
내용을 만드는 일과 병행된 또 다른 일은, ‘책의 분위기 만들기’였다. 힌트는 구름에서 가져왔다. 실질적으로 구름의 인상을 떠올리는 종이 찾기와 관련된 감상을 풀어내는 글쓰기가 이루어졌다. 막상 종이를 고르고 글을 쓸 때는 이 두 가지가 서로 연관 없는 일이라 여겼던 것 같다. 그러나 각기 다른 방식으로 움직이는 손은 결국 하나의 목표-책의 물성을 통해 아이디어를 구현하기-를 향하고 있었고, 그랬다는 사실은 나중에 알았다.
꼭 여행 같았다. 목적 없이 훌쩍 떠난 사람처럼 무엇이든 상상할 수 있다는 여유를 부렸다. 한편엔 마감을 의식하며 반드시 그 때엔 돌아가야 하는 사람처럼 주어진 기한 내에 구현할 수 있는 방식을 찾으려했다. 시간은 빠르게 흘렀고, 결과적으론 꽤 즐거웠다. 연기하는 기분이 들기도 했다. 자유로운 창작자이면서 철저한 제작자로서 몇 개월을 살기. 시도, 수정, 불안, 완성, 해소, 압박 사이를 오가되 마지막엔 실수가 없어야 하는 이 프로젝트가 한동안 구석에 가만히 웅크린 어떤 덩어리처럼 보였다. 자주 무겁고, 몇 번 두근거리고, 가끔 빛나고, 사라지니까 그립다.
-2편에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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