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매거진=구씨 작가] 작업실 동료들과 한 시간 알람을 맞추고 십분 쉬는 방식으로, 총 네 번의 기획서 수정하는 시간을 연속으로 가졌다. 약 4시간이다. 내가 쓴 글들 속을 헤엄치며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다 보면 한 시간이 가버린다. 다시 읽으며 조사 몇 개를 고치다 보면 또 한 시간이 가버린다. 기획서 안에서 자료로 쓰일 이미지를 서치 하다 보면 또 가버리는 게 시간이다. 그럼에도 자고 일어나 다시 읽으면 또 고칠 게 있는 게 내가 쓴 기획서다. ‘이것을 개운하게 제출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을 하면서 지난해의 지금 날짜 즈음 쓰던 기획서들도 살펴본다. 평소 성격은 꼼꼼함과는 거리가 있는데도 불구하고 과거에 쓴 기획서를 보니 제법 탄탄해 보인다. 우스갯소리로 말하던 공모사냥꾼이 되어버리는 건 아닌지 여러 생각에 머리가 띵하다.
기획서라는 형식을 처음 마주했을 때 당혹스러웠던 감정은 다들 그렇겠지만 생생하다. 지금은 여러 번의 실험을 바탕으로 나름대로 기획서를 쓰는 개인적인 단계가 있다.
우선, 과정에서 정리하는 시간을 오래 갖는 것을 좋아하기 때문에 처음에는 최대한 벌려 놓는 것에 열린 마음을 갖고 진행한다. 이후 전체의 70-80%완성이 된 상태에서 한 항목 정도는 갈아엎는 것도 선호하는 이상한 과정으로 기획서를 쓴다. 한번 벌려놓은 글들을 정리하는 단계는 다양한 공간에서 시도한다. 다양하면 다양할수록 좋다. 방, 작업실, 길거리, 카페 등등 여러 공간에서 수정하다 보면 보이지 않던 것들을 보이곤 한다. 전체의 굵직한 방향을 잡아내는 것은 공간을 옮긴다거나, 머리가 맑다고 되는 건 절대 아니기 때문에 조금은 이상한 방법을 찾게 되었다.
이상한 방법까지 생각해보아야 했던 이유는 기획서에 적히는 기획은 유연한 것을 향하고 있지만 그 틀과 문서는 딱딱했기 때문이다. 문서의 서식에 내 작업과 이야기를 담기 위해서는 감정적인 소용돌이가 어느 정도 필요하다고 생각하며 자주 사용하는 것은 ‘졸음’이다. 재미있는 꿈을 꿈에서 깨어나 바로 기록하는 사람처럼 졸린 상태의 사람은 무엇인가 뭉개면서 생각하고 기록하게 된다. 그 뭉개짐 속에서 종종 원하던 이야기를 찾기도 했다. 머릿속에 돌아다니는 생각이 자판이라는 키보드를 타고 넘어가 딱딱한 글자가 되어버리는 과정에서 뭉개짐은 좋은 문장으로 남기도 한다. 졸음에 기대에 눈물에 눈앞이 가려진 채로 적는 이야기(기획서)는 허술하지만 어떤 날에는 마구잡이로 이어진다. 다음날 아침에 몇 페이지의 글 중 두 문장을 제외한 모든 문장이 지워지더라도 남은 두 문장에 만족할 만하다. 이후의 살들을 붙여가는 것은 어렵지 않다.
가끔은 손이 먼저 움직이는 것인지 생각이 먼저인지 모를 만큼 자판 위의 손은 꽤 자연스럽게 연속적으로 움직인다. 가끔 멈춰서 어떤 문장이 내 마음을 전달할 수 있을지 생각해 본다. 기획서의 평가 지표에 얼마나 마음이 진실된지와 관련된 이야기는 없지만, 딱딱한 형태의 기획서일수록 결국 마음과 감정을 전달하는 게 중요하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 얼마나 이 작업을 하고 싶은지, 해야 하는지, 필요한지 등등의 마음은 냄새처럼 문장 곳곳에 베어 버린다. 문장 곳곳에 마음이 베어나기 위해서 내가 진짜로 그것을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지를 먼저 물어본다. 그런 이유로 종종 나를 먼저 설득하곤 하는데 그 과정도 수정과 비슷하게 길거리에서 걸어 다니며 하는 것이 효과적이다. 스쳐 지나가며 보이는 다양한 환경이 마치 더 많은 생각의 방향성을 낳는 것처럼 머리를 잘 돌게 해준다. 하지만 부작용으로 혼잣말을 하며 걸어가는 이상한 사람이 되는 날도 많다. 기획서를 쓰며 컴퓨터 앞에서, 버스와 지하철에서, 걸어 다니며 조금은 그럴듯한 기획서가 드디어 희미하고 모습을 드러낸다. 어떤 날은 자신이 있다가도 자신이 없다.
기획서를 쓰며 내년에 나는 또 어떻게 살고 있을까 자주 생각해 본다. 미래를 상상하는 것도 힘든데 써 내려가는 작업이라니… 몇 주를 기획서와 함께 보냈다. 다 쓰고 보니 대단한 기획서는 아니지만 쓰는 동안 이번에도 꽤 즐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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