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매거진=김연정 작가] 작업을 시작한 이후의 이야기를 하나둘씩 꺼내다 보니, 잔뜩 먼지를 먹은 구름이 회색비를 갈기는 날씨에 갇혀 있는 것 같다. ‘스불재(스스로 불러온 재앙)인가, 한편으로는 희망인가’의 이야기로 심각함을 온몸으로 무장한 자신에게 질린다.
창작을 업으로 삼아 살아내는 일은 버겁다. 그 길을 걷는 속도는 정지한 것 마냥 느리다. 하지만 결국은, 가슴 한켠에 품기로 한 창작 욕구를 끝끝내 내려놓을 수 없다면, 어두운 가정사를 지닌 무대 위의 코미디언처럼 이제는 웃겨볼 때도 되지 않았는가. 승화의 굿판을 신명 나게 벌려도 되지 않겠냐는 말이다.
사실, 이 일을 하는 것을 버텨오느라 너무 힘들었다. 주변을 둘러보면 세상 걱정 없어 보이는 이들도 저마다의 삶의 무게를 지고 담담하게 지낸다는 것을 알아서, 내 힘듦이 그리 대단한 것인지도 모르겠거니와 더 이상의 불만과 투정은 미성숙하게 느껴질 때도 있다. 감히 제가 이 정도의 결핍으로 남들을 웃겨볼 수 있을까요? 하는 마음도 든다.
이런 식의 비교가 무슨 소용이겠냐마는, SNS에서 행복해 보이는 주변인들의 삶과 나를 비교하는 것처럼 이제는 불행마저 비교하려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그것이 맞는 것 같다. 사람들은 불행도 행복도 모두 비교하고 싶은 것 같다. 그래서 어느 방향이든 꼭짓점에 자신을 놓고 싶어하는 것 같다(진짜 꼭짓점은 가늠할 수도 없으면서). 그렇게 뾰족해진다.
<에피소드 1>
작업 이야기를 하다 보면 늘 화제가 되는 것은 당연 돈 이야기다. 나는 최근에 이런저런 디자인 작업과 일러스트 일을 하다가 이전과는 전혀 다른 일을 해보게 되었는데, 무려 30분 만에 35만 원을 버는 쾌거를 이루었다. 그것은 네이버 카페에 계약 후기를 남기는 일이었다. 이쯤에서 사적인 이야기를 풀어보자면, 나는 결혼을 앞두고 있다(믿기지가 않는 문장이다).
결혼식에 대비해 여러 가지를 체크하는 과정에서 음악을 알아서 준비해 올 것인지, 웨딩홀에서 제공하는 삼중주를 30만 원이 넘는 돈을 내고 이용할 것인지가 선택지에 있었다. 그런데 웨딩홀 계약 후기를 블로그에 500자 이상 남기면 삼중주가 무료로 제공된다는 것이 아닌가. 고민할 여지가 없었다.
나는 오늘 카페에서 한 달에 한 번 칼럼을 쓰기도 어려워했으면서, 500자가 넘는 리뷰를 사진 보정 작업과 함께 30분 만에 썼음을 고백한다.
이걸로 35만 원은 굳은 것이다. 어찌나 능력자가 된 기분인지 자존감이 올라가는 것 같다(그놈의 자존감!). 그동안 하루 종일 일해도 좀처럼 벌기 힘들었던 그놈의 돈 때문에 자존감이 어찌나 떨어졌던가(진짜 그놈의 자존감!).
3일 내내 그린 그림보다도 더 값을 쳐주는 웨딩 산업! 나는 결국 돈 되는 결혼 시장에 몸소 다이빙하여 35만 원을 벌고야 말았다.
미친 듯이 휘갈기는 글에 영혼 한 스푼. 올리자마자 댓글이 반응하는 이 쾌감. 내 작업에 관심있는 사람보다도 나의 결혼 후기에 관심을 가질 사람들이 더 많을 것 같다.
제도권에 착 붙은 산업의 모양새는 이러하구나. 숨만 쉬어도 돈이 나가고 조금만 수고해도 돈이 벌리는구나(착각이지만). 젠장. 제도권을 깨부수고 싶어 하는 예술가들은 정말로, 진짜로 소외된 것이 분명하구나!!
아무래도 35만 원을 벌었다는 감각은 마치 백화점에서 할인가에 넘어가 구매를 했는데 알고 보니 차감액을 상품권 지급으로 받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소비를 조장하는 눈속임 말이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이득을 봤다는 감각이다. 그런 맛이 있어야 신나게 글을 휘갈기는 것처럼 기꺼이 노동을 할 테니까. 자신을 내던져 만든 작업에도 비슷한 무언가가 있었다면 신나게 노동력을 불태웠을까? 그런 에너지가 생길까.
눈에 보이는 가시적인 성과, 즉 돈은 중요하다. 하지만 예술가들은 기득권을 타파하자는 쪽에 늘 서있게 될 것이므로 돈이 벌릴 일은 앞으로도 쭉 그른 것 같다. 근데 나는 양쪽 다 탑승하고 있으므로.. 앞으로 기대해봐도 좋은 것인가..?
<에피소드 2>
펜과 그림이 붙으면 여전히 펜이 이기는 세상이다. 그림작가는 자신의 작업을 문자언어로도 말해야 한다. 문자언어는 이미지 언어보다 비교적 쉽게 그 논리정연함과 유려함, 깊이를 가늠할 수 있으므로 문자언어를 잘 다루는 작가들은 더 높은 평가를 받는다. 이미지 작업이 아무리 좋아도 그 작가의 문자언어 실력이 형편없으면 평가를 달리한다는 말은 공공연하게 들어왔다. 그런 말을 해도 되는 분위기다.
그러니 이미지 언어를 다루는 작가들이여, 제2외국어라 생각하고 이미지를 다루면 마음이 편하다. 제1외국어는 문자언어임을 받아들이자. ‘외국어’라고 말한 까닭은, 사람들의 제1언어가 무엇인지는 아무도 모르기 때문이다. 무슨 말들을 지껄이는지 도통 모르겠다.
어쩐지 컨택트(테드창의 소설을 각색한 영화. 시제가 없는 언어를 가진 외계인이 나온다)의 외계인의 언어가 떠오르는 밤이다. 그 언어가 있다면 말과 말 사이의 정적은 필요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무슨 말을 내뱉을지 조마조마한 마음도 사라지겠지. 누구는 속 긁는 소리를 안 하겠지. 내 안에 자리한 어떤 결핍도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농담도 없어질 것이다. 그러면 조금 아쉬울 것 같다.
에피소드>
에피소드>
Copyright ⓒ 문화매거진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본 콘텐츠는 뉴스픽 파트너스에서 공유된 콘텐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