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국 헌법재판소가 지난 7일(현지시간) ‘무브 포워드(전진)’당에 대해 해산 명령을 내렸다. 전진당은 지난해 총선에서 가장 많은 의석 수와 득표율을 기록했으나 내각 구성을 하지 못했다.
또한 이번 판결에 따라 전진당을 이끌던 카리스마 있는 젊은 지도자 피타 림짜른랏 대표와 당내 다른 고위 인사 10명은 앞으로 10년간 정계에 진출할 수 없게 됐다.
헌재의 이러한 판결은 올해 1월 전진당이 공약으로 내세운 왕실 모독법 개정이 위헌이라고 이미 판결했기에 어느 정도 예상된 바였다.
헌재는 왕실 모독법 개정은 입헌군주제 파괴 시도와 같다고 봤다. 태국에서 왕실모독법은 가혹하기로 악명이 높다.
국민이 선출하지 않은 기관이 군주제의 힘과 지위 보존을 위해 어디까지 할 수 있는지 다시 한번 극명하게 보여주는 판결이다.
하지만 이번 판결로 태국 정치계에서 개혁주의 운동이 아예 몰락하는 건 아니다. 살아남은 전진당 소속 의원 142명은 앞으로 다른 정당으로 이적해 제1야당으로서 의회에서 제 역할을 다할 것으로 예상된다.
전진당은 SNS에 “새로운 여정이 시작됐다. 여러분, 함께 계속 걸어갑시다”라는 내용의 메시지와 함께 영상을 게시했다.
전진당의 현 당수이자 정계 진출이 금지된 이들 중 하나인 차이타왓 툴라톤은 의회 회의장에서 일어나 동료 의원들에게 함께 일할 수 있어 “영광”이었다며 작별 인사를 건넸다.
한편 태국 쭐랄롱꼰 대학에서 정치과학을 가르치는 티티난 퐁수디락 교수는 이번 판결이 “과연 태국이 입헌 군주제인지, 아니면 절대 군주제인지에 대한 의문을 일으킬 수도 있다”고 봤다.
그러면서 “어떻게 보면 기시감이 느껴기도 하고, 어떻게 보면 미지의 영역 같기도 하다”고 표현했다.
이번 사건은 당시 총선에서 예상외의 성과를 보인 ‘퓨처 포워드 당’이 해산되고 무브 포워드(전진)당으로 변신했던 2020년의 상황과 거의 흡사하다.
4년 전 퓨처 포워드 당 해산 판결은 대규모 거리 시위로 이어졌다. 청년 학생 운동가들이 주도한 이 시위는 6개월간 이어졌으며, 군주제에 더욱더 책임감 있는 모습을 요구하는 전례 없는 사건이었다.
이후 태국 당국은 왕실 모독죄를 광범위하게 적용해 전진당 소속 의원 일부를 포함한 시위 지도자 수백 명을 기소했다.
태국에서 왕실 모독법은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는 것으로 악명 높은데, 전진당은 성명서를 통해 현재 최고 징역 50년 형까지 선고 가능한 해당 법의 처벌 수위를 낮추고, 기소 절차를 좀 더 철저하고 엄격하게 강화하자고 제안한 바 있다.
한편 지난해 선거에서 일부 개혁주의자들은 전진당이 2019년의 퓨처 포워드 당만큼의 좋은 성적을 거두지 못할 것이라며 우려했으나, 이는 근거 없는 것으로 드러났다.
전진당은 예상을 뒤엎고 모든 타 정당을 제치고 최대 의석수를 차지했는데, 이는 변화를 향한 태국인들의 강한 열망을 반영하는 결과였다.
그러나 군부가 임명한 이들로 채워진 태국 상원은 전진당이 제안한 왕실 모독죄 개정을 이유로 삼아 이들의 내각 구성을 저지했고, 이에 대신 보수 성향의 정당 11개가 연합해 차기 정부를 구성하기로 했다.
여러 사회운동가들이 투옥되거나, 망명길에 올랐거나, 범죄 혐의를 받고 있기에 오늘날 2020년과 같은 대규모 시위는 찾아보기 힘들다.
심지어 전진당은 왕실 모독죄 관련 처벌을 조금 완화하자는 식의 매우 온건한 제안을 했으나, 4년 전 퓨처 포워드 당이 그랬듯, 당 대표가 쫓겨나야만 했다.
그리고 4년 전과 비슷한 시위를 주도하려는 이들이라면 왕실 모독죄와 기타 형법 위반으로 기소돼 혹독한 처벌을 받게 되리라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을 것이다.
2006년 이후 34개 정당을 해산한 태국 헌재는 오랫동안 보수적 현 사회를 유지하는 주요 수호자 같은 존재로, 그 중심엔 군부가 있으며, 정치에 적극적인 군부의 비호를 받는다. 그 외에도 태국에선 궁정 관리, 고위 판사, 거물급 기업인, 군인, 경찰 등이 권력을 남용한다.
군부가 마련한 헌법에 따라 상원은 헌재 재판관 임명뿐만 아니라 선거관리위원회, 국가 부패 방지 위원회 등 영향력 있는 의회 외 기관 인사에도 결정적인 역할을 할 수 있다.
올해 새로 구성된 새 상원 이전, 2014~2019년 태국을 통치한 군사 정권이 구성했던 이전 상원은 오늘날 정당들이 겪는 정치 지형을 다시 썼으며, 전진당의 내각 구성을 막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새로운 상원이 무엇을 기대할 수 있을진 불분명 했으나, 특이한 선거 시스템으로 인해 상원 의석을 원하는 이들만 투표권을 행사할 수 있었다.
불투명한 뒷거래로 결정된 일부 의원 등 그렇게 새로운 상원 200명이 선출됐는데, 대부분은 군주제에 대해 변치 않는 충성심을 보이는 것으로 유명한 정당과 연관 있는 것으로 보인다.
추가 보도: 타냐랏 독소네(방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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