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매거진=최여민 작가] 구름이 낮게 드리워진 하늘 아래 사색에 잠길 찰나 제주도에 도착했다. 비행기 창문에는 어느새 비가 내려 물방울이 맺혀있었다. 첫 비행의 경험을 주었던 가족여행, 학창 시절을 아름답게 장식해 준 수학여행, 코로나 이후 처음 떠난 여행 모두 비가 오는 제주와 함께였기에 맑은 날보다 더 좋을 것이라는 이상한 기대감이 들었다.
빗소리와 함께 가라앉은 공기가 안개로 짙어질 무렵 김창열미술관 앞에 도착했다. 야생화와 검은 돌들이 나란히 놓여 길을 따라 펼쳐졌는데, 녹음들이 비에 젖어 유독 밝고 선명했다. 그에 반해 돌은 더 칠흑같이 어두워 보여 완벽한 대비를 이뤄냈다.
이곳을 걷다 보니, 마치 동화 속 한 장면에 들어온 것처럼 비현실적인 느낌이 들었다. 우산을 쓰고 가는 데도 바람과 함께 내리는 비 때문에 피부와 가방, 옷가지에 할 것 없이 빗방울이 달라붙었다. 작품을 만나러 들어가는 길목에서 물방울이 나에게 말을 건네는 것이 분명했다.
미술관에 들어서자마자 가장 먼저 만날 수 있는 ‘물의 나라 이야기’에는 김창열의 추억이 담겨있다. 그가 태어나고 자란 맹산에는 강이 흐른다. 물의 고장으로 불릴 만큼 물방울들이 넉넉한 그곳에서의 서사가 여기에 깃들어 있다.
친구들과 물에서 한껏 놀고 저녁이 되어 각자 집으로 돌아가 머문다. 물이 흘렀던 고향의 모습은 거대한 모래사장이 되어 바닥에 놓여있다. 모래의 가장자리를 따라 옅게 흐르는 물은 모래사장 위로 흘렀던 고향의 강을 넌지시 알려준다. 그 위로 벽에 칸칸이 걸려있는 20개의 철제 상자는 각자의 집이 되어 나타난다. 그 안에 각기 다른 크기와 모양으로 존재하는 물방울들은 이제는 볼 수 없는 기억 속 친구들이 들어있다. 김창열의 가장 행복했던 추억인 동시에 너무나도 그립지만 다신 근처도 갈 수 없는 텁텁한 싱그러움이 미술관에 놓여있다.
한국전쟁으로 소중한 존재들을 상실한 김창열의 슬픔은 거대했다. 하지만 그보다 컸던 홀로만 살아남은 것에 대한 죄책감이 더 큰 파도가 되어 덮친다. 그는 묵직하게 짓누르는 이 고통을 오래도록 변하지 않는 물방울을 빌어 이야기한다. 집으로 돌아간 친구들과 물장구쳤던 고향, 그 무엇 하나 다시 조우할 순 없지만 이를 반추하는 것만으로도 큰 위로가 된다. 김창열의 추억은 오지 않을 과거의 유물이 아니라 죄스러운 마음을 전하며 현재를 지탱해 주는 버팀목으로 존재한다.
물방울의 축제가 시작되었다. 하늘에서는 빗방울이 분수에서는 물방울이 쏟아지며 중정에 쉴 새 없이 자국을 남긴다. 이는 곧 스며들어 다시 물방울이 될 준비를 마친다. 외부의 문을 열고 나가 볼 수 있는 빛의 중정에서는 건물의 둘러싸인 ‘삼신’ 작품을 최적의 시선으로 감상할 수 있다.
외부로 연결되는 건물의 경사면을 따라 오르면서 감상할 수 있는 ‘삼신’은 각기 다른 위치에서 색다른 모습으로 바라볼 수 있다. 분수의 가운데 놓인 3개의 물방울은 분수에서 끊임없이 나오는 물방울과 매일의 빛, 감상하는 우리와 건물의 형태를 머금으며 단 한 순간도 같지 않은 모습으로 자신을 내세운다.
코끝을 스치는 바람, 낮게 나는 새, 뭉게구름과 흩날리는 구름 모두 각자의 방식으로 인사를 건넨다. 복잡한 세상 속 그들의 인사에 보통은 무심하게 대하지만 미술관을 방문했던 그날만큼은 여태껏 함부로 대했던 물방울이 살아 숨 쉬는 것처럼 생생하게 느껴졌다. 김창열과 만난 물방울 역시 찰나로 사라지지 않고 자신의 존재를 증명한다. 그의 추억을 간직하기도, 화해를 건네기도, 괴로울 때 함께 수행하기도 했던 흔적들이 미술관에 선명하게 담겨있다. 그에게 다가와 특별해진 물방울은 또다시 우리에게 새로운 물방울이 되어 말을 건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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