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매거진=벼내림 작가] 숨기고 싶은 이야기가 하나 있다. 결국 이 결함이 나를 멀리 움직이게 해주었지만.
살면서 내 방을 가져본 적이 없다. 그리는 것에 재미를 붙이기 시작했을 무렵엔 그림 그릴 마땅한 곳이 없는 게 제일 난항이었다. 집에서 그리고 싶을 땐 최선의 방법이 거실에 밥상을 펴는 일이었다. 커다란 갈색 밥상을 편 다음, 미술 재료를 마구잡이로 펼쳐놓고 그림을 그렸다. 보통은 집에서 수채 물감으로 밑 색을 칠해두고, 2차 작업으로 밀도를 올리기 위해 색연필만 사용할 경우에는 카페를 갔다.
따뜻한 원목 인테리어의 카페였다. 지금은 없어졌지만 자주 가던 곳이었다. 낮에는 카페 앞 나무 그림자가 정말 예쁘게 지던 곳이라 잠시 나무 그림자를 보며 멍 때렸던 기억도 어렴풋이 난다. 자주 방문해서 나중엔 사장님과도 친해졌는데 어느 날엔가 음료를 내주시며 “오늘은 무슨 그림 그려요?”하고 말을 걸어주시기도 했다. 따뜻한 장소에서의 다정한 물음이었다. 집중도 잘되고 마음이 편안해지는 좋은 곳이었지만 오랜 시간 머무르기에 죄송했고, 해가 지날수록 온전한 혼자만의 공간이 절실히 필요했다. 그냥 손 뻗으면 미술 재료는 항상 거기 있고, 몸만 가면 되는 그런 곳이.
그러다 공유 작업실이란 공간을 알게 되었다. 책상 크기에 따라 달마다 지정 금액을 내면 되는 곳이었는데 생각보다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공유 작업실 업체에 카카오톡으로 남은 자리가 있냐고 물어보니 그렇다고 하셔서 덜컥 계약을 해버린 거다. 스물넷이 되고야 처음 내 책상 하나를 가지게 되었다. 한 번도 가져본 적이 없어서 그런 걸까? 처음엔 너무 어색했다. 스케치북과 색연필, 물감 정도만 가져다 놓고 크기가 큰 그림도 그려봤다. 아이패드나 노트북 같은 고가의 물품은 들고 다니다 적응이 된 후엔 놓고 다녔다. 손 뻗으면 미술 재료가 항상 여기 있고, 몸만 가면 되는 곳이었다.
하지만 그 안정은 오래가지 못했다. 작년 12월 갑작스러운 폐업 결정을 듣게 되었기 때문이다. 사유는 건물주의 요금 인상이었다. 당시 나는 보증금 없이 달마다 돈을 내는 입장이었기에 군말 없이 떠나야 했다. 2년 가까이 집처럼 머물러 짐이 한 가득인 상황이라 머리가 굉장히 아팠다. 당장 한 달 안에 새로운 보금자리를 찾아야 했다. 사실 통보받은 당일은 울기 바빠 정신이 없었다. 다음날부터 바로 짐 정리를 하며 여러 작업실을 알아보았다. 금액대는 더 높아졌지만, 집과 훨씬 가까워진 작업실을 찾았다.
새로 이사한 작업실은 접근성이 좋아진 것 말고도 몇 가지 장점이 더 있는 곳이다. 공유 작업실이긴 하지만 열쇠로 문을 잠글 수 있는 ‘방’을 가지게 되었다. 또 창문이 정말 큼지막해서 하늘이 잘 보인다. 요즘은 그림을 그리다 하늘 멍을 자주 한다.
다시 찾아온 이 안정감도 얼마나 유지될 진 알 수 없겠지만 밥상에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해 방을 얻기까지 5년이라는 시간이 걸렸다. 스스로를 느리지만 꾸준히 전진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숨구멍 하나를 갖기까지 긴 시간이 걸렸다. 작게 “내가 해냄”이라고 속삭여본다. 대단한 일을 한 것 같아 기분이 좋아진다. 다시 5년 후가 되었을 땐 개인 작업실을 마련할 수 있을 거라는 굳은 믿음을 가지고 조금씩 나아가야지. 티끌 모아 태산이라고 하지 않는가. 밥상을 펴놓고 그림 그리던 마음가짐은 유지한 채, 오늘도 한 보 전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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