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리뉴스 김승훈 기자] 윤석열 대통령이 전날 국회 본회의를 통과한 전세사기 특별법 개정안에 대해 거부권을 행사하며 법안 통과 하루만에 폐기됐다. 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하면 다시 국회로 돌아가 재표결이 가능하지만 21대 국회 임기가 오늘 끝나기 때문이다.
정부는 이번 개정안으로는 피해자의 '신속한 구제'라는 목표를 실현할 수 없다며 오는 22대 국회에 정부안을 제출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이같은 소식이 전해지자 전세사기 피해자들은 29일 오전 대통령실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22대 국회에서도 특별법 개정 촉구 활동을 이어가겠다고 예고했다.
한편, 윤 대통령은 이날 전세사기특별법개정안뿐만 아니라 민주유공자예우에관한법률안과 농어업회의소법, 지속가능한한우산업을위한지원법 제정안 등 4개법안에 대해 민주당 단독 통과된 법안에 대해서 거부권을 행사했다. 이로써 윤 대통령의 취임 후 거부권 행사는 채상병특별법 거부권이 10번째인데 이어 11번~14번째로 늘었다.
전날 28일 21대국회 마지막 본회의에서 전세사기특별법과 4.16세월호참사피해구제및지원특별법 개정안·민주유공자예우관련법·지속가능한한우산업지원법·농어업회의소법 제정안 등 5개 법안을 국민의힘이 퇴장한 가운데 더불어민주당 등 야당이 단독처리했다.
야당 단독으로 통과된 5개 법안 중 세월호피해지원법 개정안에 대해 정부는 윤 대통령에게 재의요구를 요청하지 않아 윤 대통령은 이 법안에 대해서는 거부권을 행사하지 않았다.
尹, 전세사기특별법 등 4개 쟁점법안 11~14번째 거부권 행사...세월호 지원법은 거부권 행사 안해
대통령실은 이날 오후 언론 공지를 통해 윤 대통령이 국무회의에서 의결한 4개 법안의 재의요구안을 일괄 재가했다고 밝혔다.
앞서 전날 더불어민주당 등 야당은 국회에서 △전세 사기 피해자 지원 및 주거 안정에 관한 특별법 △민주유공자 예우에 관한 법률안 △농어업회의소법 △지속가능한 한우산업을 위한 지원법 등을 국민의힘 불참 속에 단독으로 통과시켰다. 대통령은 법안의 정부 이송 후 15일 이내 거부권 행사 여부를 결정하도록 돼 있지만, 21대 국회 임기 종료가 임박해 즉각 거부권을 행사한 것이다.
이 가운데 민주유공자법 제정안은 예우받을 수 있는 민주화운동 관련자를 "1964년 3월 24일 이후 반민주적 권위주의 통치에 항거해 헌법이 지향하는 자유민주적 기본질서 확립에 기여한 희생 또는 공헌이 명백히 인정되어 사회적 공감대가 형성된 사람"으로 대폭 확대한다는 내용이다. 이에 대해 여당은 민주유공자를 선정하는 기준과 절차가 명확하지 않아 대상자 선정이 자의적으로 이루어질 소지가 크다고 반발했다.
농어업회의소법은 농림어업인의 정책 참여를 촉진하기 위해 농어업회의소의 설립 근거를 마련하고, 국가와 지방자치단체가 농어업회의소 정착을 위해 필요한 경비를 지원토록 한 법안이다. 정부·여당은 해당 법안에 대해 지자체에 대한 재정의존도가 높아 관변화할 우려가 있고 기능 중복에 따른 비효율도 발생할 수 있다고 반대한다.
한우산업 지원법안은 한우 수급 정책에 따라 도축·출하한 한우 농가에 장려금을 지원하는 등 각종 지원 시책 규정을 마련하기 위한 법안이다. 정부·여당은 돼지, 닭 등 다른 축종 농가들과의 형평성에 어긋날 수 있다고 우려하며 반대 입장을 보였다.
이날 윤 대통령이 4건의 법안에 대해 거부권을 행사하면서 취임 후 거부권 행사는 11번~14번으로 늘었다.
전세사기특별법...민주, 주택도시기금 활용 '선구제 후회수' 담은 개정안 추진
정부, 개정안 반대 "기금 손실 1조원 예상.. 형평성에도 문제"
국회는 28일 오후 본회의를 열어 재석 170명에 찬성 170명으로 '전세사기피해자 지원 및 주거 안정에 관한 특별법' 개정안을 가결했다.
더불어민주당 등 야당 의원들만 표결에 참여했고, 국민의힘은 야당의 강행 처리에 항의해 불참했다.
이른바 '선구제 후회수'로 불리는 해당 개정안은 주택도시보증공사(HUG) 또는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기관이 전세사기 피해 주택의 보증금 반환 채권을 매입해 피해 임차인을 우선 구제해 주고, 추후 임대인에게 구상권을 청구해 비용을 보전하는 게 핵심이다.
이는 기존의 특별법으로는 후순위 임차인이나 위반 건축물·신탁 전세 등 사각지대 피해자들의 실질적 피해 회복이 어렵다는 지적이 제기되어 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부는 야당이 주장하는 개정안대로 할 경우 주택도시기금 손실이 1조원에 달할 것이라며 반대해 왔다.
대신 주무 부처인 국토교통부는 본회의 하루 전인 지난 27일 기존 특별법을 추가 보완하는 내용의 지원책을 대안으로 제시했다.
한국토지주택공사(LH)가 피해자의 우선매수권을 양도받아 경매에 넘어간 주택을 감정가보다 낮은 가격에 매입하고, 여기서 발생한 '차익'을 피해자 주거 지원에 사용하겠다는 것이다.
전세사기 피해 주택은 복잡한 권리관계 때문에 낙찰가율(감정가 대비 낙찰가 비율)이 평균 67% 수준이어서 시세 차익을 충분히 낼 수 있다는 게 정부의 설명이다.
예를들어 감정가 1억1000만원인 전세사기 피해 주택을 LH가 8500만원에 낙찰받으면 차액인 2500만원은 피해자에게 지급하는 것이다. 피해자는 최초 10년간 무상으로 해당 주택에 살 수 있고, 추가로 10년 동안 시세의 절반 수준으로 임차료를 내고 더 거주할 수도 있다. 피해자는 무주택 요건만 충족하면 최초 10년 뒤 10년간 더 거주할 수 있다.
여기에 그간 매입대상에서 제외됐던 위반건축물, 신탁사기 주택 요건을 완화해 매입하고, 다주택은 경매차익을 피해액 비율대로 안분하도록 해 후순위 임차인들의 보증금 회수 방안을 보완하기로 했다.
한덕수 총리, 재의요구안 의결.. 尹, 재가 하며 하루만에 폐기
전날 본회의에서 특별법 개정안이 통과되자 정부는 즉시 윤석열 대통령에게 거부권 행사를 건으했다.
한덕수 국무총리는 29일 "정부와 여당에서 지속적으로 문제점을 지적해왔던 법안들을 수적 우위를 앞세운 야당 단독으로 통과시켰다"며 법안에 대한 재의요구안을 의결했다.
한 총리는 이날 오후 정부서울청사에서 열린 임시 국무회의에서 "국회의 입법권은 존중되어야 한다"면서도 "국가와 국민 전체의 이익을 수호해야 할 책무가 있는 정부로서는 막대한 재정 부담을 초래하는 법안, 상당한 사회적 갈등과 부작용이 우려되는 법안들이 일방적으로 처리된 것에 대해 깊이 고민하지 않을 수 없다. 이 같은 법안들이 시행될 경우, 그 피해는 고스란히 국민들께 전가되기 때문"이라고 야권을 겨냥했다.
이어 "야당은 '선 구제 후 회수 지원방식'을 골자로 하는 '전세사기피해자 지원 특별법' 개정안을 일방적으로 통과시켰다"며 "이 법이 시행되면 임차보증금반환채권 매입에 수조 원의 주택도시기금이 소요될 것으로 예상되며, 투입된 비용의 상당액은 회수도 불투명해 기금 부실화가 우려된다. 결국 주거복지 증진 등 본연의 사업은 위축될 수밖에 없다"고 덧붙였다.
또한 한 총리는 여러 유형의 사기 피해자와의 형평성 등 이 법안이 안고 있는 여러 문제점을 정부와 여당은 지속적으로 제기했다는 점을 짚었다.
국토부도 전날 참고자료를 통해 "개정안은 사인 간 계약에 따른 사기 피해자를 국가가 공공의 자금으로 직접 구제하는 전례 없는 법률안"이라며 "보이스피싱 등 전기통신금융사기나 다단계판매 사기 등 다른 사기 피해 모두 범죄로 인한 피해인데, 전세사기 피해에 대해서만 다르게 대우하는 것은 헌법상 평등원칙에 반할 우려가 있다"고 설명했다.
이후 윤 대통령은 이날 오후 재의요구안을 재가했다. 이로써 전세사기 특별법 개정안은 하루 만에 자동 폐기 됐다. 이는 21대 국회의 임기가 끝나기 때문이다.
국회 사무처는 21대 국회 재의요구안을 22대 국회에서 의결할 수 없다고 보고 있다. 지난 2016년 5월 19대 국회에서도 상임위 청문회 활성화를 골자로 한 국회법 개정안에 대해 박근혜 전 대통령이 국회 임기 만료 직전 거부권을 행사했고, 20대 국회에서 재표결이 이뤄지지 않았다.
정부, 22대 국회서 특별법 '정부안' 발의 예고.. 다시 처음부터 논의
국토부는 22대 국회에서 특별법 '정부안'을 새로 발의하겠다는 입장이다.
이날 박상우 장관은 정부서울청사에서 브리핑을 열고 "개정안은 공공에서 피해자들이 보유한 전세보증금 반환 채권의 가치를 공정하게 평가해 최우선변제금 이상의 가격으로 매입하고, 그 대금을 주택도시기금에서 지급하도록 하는 것이 핵심 골자인데 현실적으로 작동하기 어렵다"고 지적했다.
박 장관은 올해 주택도시기금에 전세사기 피해자 지원 예산이 반영돼 있지 않다는 점도 언급했다.
그는 "올해 주택도시기금에는 전세사기 피해자 지원에 대한 예산이 반영돼 있지 않다"며 "기금은 무주택 서민의 청약저축에서 빌려온 재원인 만큼 이를 활용하는 데에는 국민적 합의가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박 장관은 "사회의 기본 시스템을 무시하는 초법적인 내용으로는 결코 문제를 해결할 수 없고 오히려 혼란과 갈등만 증폭시키게 된다"며 "그래서 정부는 27일 경공매 시스템을 활용해 이 과정에서 발생하는 경매차익으로 피해를 보전하고 피해주택을 공공임대주택으로 전환함으로써 주거안정 지원하는 해결하는 방안을 제시한 바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일각에서는 개정안이 통과되면 전세사기 피해자를 신속 구제할 수 있고 정부는 구제에 반대하는 것처럼 주장하지만 정부는 정부안이 신속히 제도화될 수 있도록 여야와 긴밀히 협의하고 각계각층의 전문가와 함께 보완하고 발전시켜 나가겠다"고 밝혔다.
전세사기 피해자 1만7천명, 내년 5월 3만명 넘을 듯.. 8명 스스로 목숨 끊어
피해자들 "한시 급한 상황에 거부권 이해 할 수 없어.. 구조 요청에 즉각 응답하라"
하지만, 22대 국회에서 다시 논의를 시작하게 되면 언제 특별법 개정안이 통과될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때문에 전세사기 피해자들의 고통이 더 길어질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지난해 특별법 제정 1년 만에 정부 인정을 받은 전세사기 피해자 수는 1만7000명을 넘어섰으며 8명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게다가 앞으로도 전세 계약 만기가 도래함에 따라 피해자 수가 내년 5월까지 최대 3만6000명으로 늘어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고 있다.
전세사기·깡통전세 피해자 전국대책위원회와 전세사기·깡통전세 문제 해결을 위한 시민사회대책위원회는 29일 용산 대통령실 앞에서 윤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를 규탄하며 즉각적인 대책 마련을 촉구했다.
이철빈 전세사기전국대책위원회 공동위원장은 "전세사기 피해를 당했지만, 보증금 일부 손실을 보더라도 새로운 곳으로 이사해서 일상을 시작하는 것이 전세지옥을 탈출하는 유일한 길이라고 믿는다"며 "그런데, 저와 피해자들은 특별법 개정안이 통과하자마자 거부권을 행사하겠다는 소식에 분노하지 않을 수 없다"고 했다.
이 공동위원장은 "한시가 급한 피해자의 삶에 거부권을 행사하는 정부, 여당, 대통령실의 태도를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다"며 "지켜야 할 사람을 지키지 않고, 성실히 세금내며 살아온 국민들을 세금 낭비하는 것처럼 매도하고, 뒤로는 건설사와 은행에 수십조 원을 퍼부은 이 정권은 전세사기 피해자와 국민의 심판을 받을 것"이라고 분노를 표했다.
그는 특히 국토교통부가 전세사기특별법이 국회를 통과하기 불과 하루 전 내놓은 자체 구제책에 대해서도 조목조목 비판했다.
이 공동위원장은 "정부에서 피해자를 '배려'해 피해주택에서 최장 20년간 살도록 하겠다고 한다"면서 "청년인 피해자들은 거주 이전의 자유와 직장·결혼·출산 등 여러 인생계획을 모두 포기하고, 시설관리도 제대로 되지 않는 위험천만한 피해주택에서 거액의 대출채무에 깔려 수십 년을 홀로 늙어갈 예정"이라고 꼬집었다.
이어 "현 정부는 지난 1년간 제대로 된 특별법 보완 입법이나 대책도 내놓은 적 없으면서 개정안 표결 전날 기습적으로 정부 대책을 발표하며 피해자를 우롱했다"며 "피해자와 제대로 이야기 나눈 적도 없으면서 피해자의 의견을 수렴했다고 거짓말하고, LH 매입에는 어차피 국가의 예산이 들어감에도 불구하고 돈 한푼 안 들이는 것처럼 국민을 기만한다"고 했다.
그러면서 "특별법 개정없이 시행 가능한 것이라면 진즉 했어야지, 왜 희생자가 8명이 나오는 동안 기다렸느냐"며 "사람이 죽기를 기다리면서 찔끔 대책 내놓는 것을 보면 이 정권은 사람의 목숨값을 너무 가벼이 여기는 것 같다"고 지적했다.
피해자들은 공동회견문을 통해 "윤석열 대통령은 국회가 의결한 전세사기특별법 개정안을 즉각 공포함으로써 그 책무를 다해야 한다"면서 "만약 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한다면, 피해자들의 숨 쉴 구멍조차 막아버리는 잔인한 결정이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이어 "여당인 국민의힘이 보인 태도와 국토부가 사실상 거부권을 염두에 둔 지원책 발표로 피해자들은 더욱 불안해하고 있는 상황"이라며, "대통령은 피해자들의 구조요청에 즉각 응답해 전세사기특별법 개정안을 즉각 공포하라"고 촉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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