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매거진=윤건호 작가] 태블릿 한 대와 펜 한 자루만 있으면 유화, 수채화, 삽화 등 거의 모든 스타일의 그림을 그릴 수 있는 디지털 시대. 초연결 사회, 그래픽의 시대가 도래한 21세기 미술에서 왜 ‘재료’를 다루어야 할까?
기술의 집결지라 할 수 있는 무기체계의 영역에 빗대보자면, 이는 재래식 무기와 자동화 무기의 ‘동시 운용’과도 같다. 버튼 몇 개 누르는 것으로 모든 동작을 실행하는 자동화 무기가 있음에도 재래식 무기에 대한 숙련을 위해 훈련하고 운용하는 것은 단순히 정신무장이나 체험만을 위함이 아니다. 무기와 기술의 원리와 목적성을 이해하고 심도 있게 다루기 위함이다. 어떻게 작동하는 것이고, 어떠한 목적을 위해 운용되며, 어느 부분에서 효율이 발휘되는지 ‘왜?’를 파악해야 ‘무기’는 제 역할을 할 수 있고, 사용될 ‘전략’을 수립할 수 있다.
미술도 마찬가지다.
발전된 기술은 무한한 드로잉과 채색을 가능하게 한다. 한술 더 떠 현재는 디지털 페인팅을 넘어 AI가 그림을 그려주는 Midjourney(미드저니), DALL-E 2(달리) 등이 등장하며 ‘미친 화력’으로 무장해버리는 현실이다. “굳이 물감, 안료, 연필, 종이 등 재료를 왜 써?”라는 말이 나오는 것도 이해가 된다. 그럼에도 불편한 재료를 배우고 사용하는 이유는 바라보는 관점을 그림으로, 개념과 철학을 이미지로 그려내는 전략을 수립하고 의도대로 표현하기 위해서다. 디지털 페인팅, AI의 한 꺼풀을 넘겨본다면 결국, 실제 재료의 특징과 표현 기법의 흉내이다. 때문에 기법을 구현하기 위해 특정 툴(도구)에 얽매이게 된다.
예를 들어 물과 물감의 합으로 표현을 이루는 수채화 기법은 숙련된 화가도 100% 컨트롤 불가능한 우연성이 특징이다. 물을 사용하기 때문에 물감이 스며들고 퍼지는 과정을 물에게 맡기기도 하고 직접 이끌기도 하며 상호작용을 한다. 액체에 쉽게 녹아나는 수성 물감의 특성은 수채화의 수정을 어렵게 한다. 때문에 한 번의 터치에 완성도가 있어야 원하는 표현을 이룰 수가 있다.
수채화 스타일을 디지털 페인팅으로 구현할 때는 ‘물’이 없기 때문에 ‘우연성’은 없고 ‘상호작용’ 또한 없다. 재료와의 합이 없으니 수동으로 흉내를 내줘야 한다. 수채를 모사하는 전용 브러쉬들로 채색을 하고 마르는 과정이 없기 때문에 칠하는 즉시 물감이 마른 듯한 표현이 나타난다. 물로 녹여낸 표현은 ‘섞기’ 기능의 별도의 툴로 색을 풀어주며 묘사하는 과정을 거친다.
흉내는 근본에 향한 탐구와 관찰의 심도가 깊을수록 완전해진다.
근본적인 공감과 경험 없이는 구사하는 기법과 표현을 운용하기 힘들고, 이미지를 그려내는 전략을 수립하는 것 또한 어렵다.
재료는 특성과 원리, 근본적인 이해로 접근하는 과정을 직접 체험하게 만든다. 재료를 다루고 운용할 때, 기술은 새로운 ‘도구’이자 강력한 ‘무기’가 되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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