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매거진=백한구름 작가] 전시가 끝났다! 내가 일을 느리게 해서 시간이 빠르게 흐르는 줄 알았다. 전시 후 쉬는 지금 시간이 천천히 흐른다.
새롭게 좋아하는 장소가 생겼다. 절벽 위의 카페다. 커피와 눈앞의 난간. 비가 올 듯 어두운 하늘 아래 선선한 바람이 불어서 시원하다. 난간 너머. 보이지 않는 아래에서부터 올라온 나무의 끝이 보인다. 바람에 무수한 나뭇잎이 뒷면을 보여준다. 비가 올 까봐 새들이 위아래로 낮게 난다. 회색 하늘과 아파트의 오래된 창문, 페인트 칠해진 숫자가 눈앞 가까이 들어온다. Dead End(길 없음). 벼랑 끝이라면 주인공은 벼랑 너머로 날아오르기 마련이다. 절벽 위, 지연된 시간 속에서 내 감정은 마치 하늘 위를 오락가락하는 새들의 움직임 같다.
두 번째 개인전인 ‘그곳에서 봄은 칼날처럼 펼쳐진다’는 2022년 6월부터 준비했던 전시로 오랜 시간이 걸렸다. 북디자인을 배우면서 작업을 병행했기 때문이다. 나는 북디자이너 취업을 위해 노력하면서도 작업을 포기하지 못했다. 여러 번의 취업 지원, 전시 공모 지원이 이어졌다. 내 예상보다도 디자이너 취업은 오랜 시간이 걸리는 일이었다. 그곳에서 나에게 요구하는 것들은 점점 늘어났고 나는 이를 감당하기가 벅찼다. 마지막으로 한겨레 북디자인 강의를 듣고 난 후에는 북디자이너의 길이 나와는 맞지 않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얼마만큼의 애정을 가졌는지를 떠나서 얼마만큼의 희생을 받아들일 수 있는지의 문제였다. 또 사람들 사이에서 어떤 위치에 있을 수 있고 그것을 내가 받아들일 사람인지도 문제였다. 디자인과 작업 활동, 이 두 가지를 병행하는 과정에서 바쁜 일상을 보내느라 시간이 어떻게 흐르는지도 몰랐다.
북디자인을 전업으로 하긴 힘들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지만 그럼에도 북디자인을 향한 애정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예전에 비해 시야가 넓어져 두 가지의 관점을 갖게 된 기분이다. 이번에 읽고 있는 책 요제프 알버스Josef Albers의 ‘색채의 상호작용’은 미술과 디자인의 교차점을 보여주고 있어서 천천히 읽어보고 있다. 작업과 디자인이 내 몸에 체득되어 계속 살아가기를 바란다. 두 전시의 사이 시간 동안 작업과 디자인을 번갈아 배우는 혼란과 모험을 통해 여러 종류의 사람과 부딪히며 낯가림을 이겨냈다. 오랜만에 나로서 사람들에게 드러나 존재하는 경험을 할 수 있었다. 스스로를 감추며 지내던 지난날에 비하면 용기를 갖고 앞으로 나아갔다.
이번 ‘그곳에서 봄은 칼날처럼 펼쳐진다’ 전시를 준비할 때는 내가 갖고 있던 봄의 이미지를 놓치지 않고 충분히 계획해 진행했다. 앤 카슨의 ‘유리 에세이The Glass Essay’에서 빌려온 ‘그곳에서 봄은 칼날처럼 펼쳐진다’는 문장은 뭉크Edvard Munch의 ‘봄Spring’(1889)이 가진 봄의 음울함과 신선함을 동시에 담고 있다. 나 역시 이를 참고해 갤러리 내부와 똑같은 비율로 만든 흰색 우드락 모형과 작게 인쇄한 작품들로 배치를 고민했다. 어떤 작품을 포함할지 혹은 빼야 할지 결정하고 작품들이 서로 어떤 이야기로 연결될 수 있을지 생각했다. 이 과정을 도와준 것은 비평 프로그램과 연결된 인터뷰였는데, 이 인터뷰를 통해 전시에 대한 내 생각을 정리하고 발전시킬 수 있었다. 작업 의도를 정리해 얘기하고 이에 대한 반응과 해석을 듣는 것이 즐거웠고 감사했다. 비평을 통해 나도 몰랐던 작업 방향을 이해할 수 있었다.
전시를 방문해 준 지인분들께서 이전 ‘빛과 계절’ 전시 때의 가족적인 분위기가 아닌 이번 새로운 작품들을 감상해 주셔서 감사했다. 그중 한 분이 ‘캔버스 뒷면’이라는 작품을 구매해 주셔서 작품이 그분과 좋은 경험을 갖기를 바란다. 관객분들이 이번 전시를 보고 어떠한 감상을 가지셨는지는 잘 모르겠다. 반응이 궁금하다. 친해도 자주 보지 못하는 친구를 전시를 구실로 만날 수 있는 건 행운이다. 다들 관심이 없던 작품에, 친구 중 한 사람이라도 관심을 주어서 큰 기쁨이었다. 첫 번째 개인전 때는 내내 행복하기만 했는데, 이번 두 번째 전시에서는 기분이 자주 움직여서 이 역시 새로운 성장이라고 느낀다.
나라는 사람이 얼마나 이력서와 친해지기 힘든 사람인지 알겠다. 나는 증명하지 못할 공부를 즐기는 사람이다. 이력서를 어떤 방향으로 채워야 할지 아직도 모르겠다. 나선형으로 돌고 돌아 다시 처음의 자리로 돌아왔다. 막막하지만 느리더라도 계속 나아가는 나 자신을 응원해 주고 싶다.
이제 사진, 독립출판, 해외살이를 궁금해 하고 있다. 앞으로의 나를 전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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