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매거진=벼내림 작가] 만약 오늘 아무것도 하지 않을 거라면 적어도 영화 2편은 봐야 한다는 나만의 철칙이 있다. 쉰다 해도 죄책감이 덜해지기 때문이다. 1편은 뭔가 휴식용으로 본 것 같고, 3편은 너무 많은 것 같아 2편으로 타협을 봤다. 어떤 날은 탄력을 받아 3편까지 보기도 하는데 그렇담 짧게라도 감상을 남겨두는 편이 낫다. 잔상이 금방 흐려지기 때문이다.
기록은 ‘왓챠피디아’ 어플에 주로 남긴다. 어느덧 이 곳에 기록한 영화만 1,000편이 넘어간다. 영화 기록은 대략 7년 전부터 시작했는데 나에게 있어 기록은 필수다. 그렇지 않으면 너무 쉽게 잊는다. 다시 말해 잊지 않기 위해 기록한다. 보고 넘겨버리면 1,000편 중 지나가는 한편이 될 것이 뻔했다.
왓챠는 디지털로 남겨두는 기록이기도 하고, 한 달 단위로 확인하는 데 적합했기 때문에 아날로그 기록도 따로 하고 싶었다. 같은 기록이라도 디지털에 남겨두는지, 손으로 하나하나 그려 남겨두는지도 느낌이 많이 다르다. 디지털 기록은 누군가 만들어놓은 틀에 입력만 하면 그만이라 간편 확인용에 적합한 듯싶다. 반면 아날로그 기록은 정성을 한 스푼 더 추가한 느낌이다. 어떤 종이에, 어떤 펜으로, 어떤 레이아웃으로 남겨둘지 스스로 선택해야 하는 과정이 있기 때문이다. 물론 난 후자를 더 좋아한다. 어떻게 남겨둘지 고민하는 과정까지 즐거움으로 다가온다.
아날로그 기록은 올해 본 영화를 한 지면에 담고 싶어 포스터 캘린더로 구매했다. 몇 가지 규칙도 만들었다. 먼저 1월부터 12월까지 내가 본 영화 타이틀을 그려둘 것. 가능하면 최대한 한글 타이틀로 그려야 한다. 한글을 그리며 획이 얇은지 굵은지, 각이 졌는지 둥근지, 글자 속이 비었는지 차 있는지, 수직으로 나열되어 있는지 대각선으로 휘는 형태인지, 글자 자체를 그래픽으로 풀었는지, 어떤 질감이 입혀졌는지 등등, 특징적인 부분을 체크하며 자세히 들여다보면 좋은 공부가 되기도 한다.
두 번째로는 옆에 짧게라도 감상을 남겨두는 것이다. 엔딩 크레딧이 올라간 이후로는 줄거리 정도만 기억에 남는 경우가 대부분이라 그렇다. 길게 쓰거나 멋지게 쓰지 않아도 좋다. 간단하더라도 적고 싶은 감상평을 남겨두면 그만이다. 짧게 ‘아주 아주 귀여운 영화’라고 남겨둔 날도 있었다.
셋째로 처음 본 영화와 한 번 이상 본 영화를 구분해 두는 것. 처음 본 영화의 감상평은 분홍색 형광펜으로, 한 번 이상 본 영화의 감상평은 초록색 형광펜으로 표시한다. 같은 영화를 보더라도 나이를 한 살 더 먹고 보는 영화는 또 느낌이 다르더라. 처음 봤을 땐 a라는 장면이 가장 좋았는데, 두 번째로 볼 땐 b라는 장면이 더 좋아지기도 하고. 영화를 받아들이는 깊이도 조금 달라지는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 구분해 두기로 했다.
마지막으로는 넘버링을 할 것! 이건 미리 해놓으면 편해서 그렇다. 이제까지 총 22편의 영화를 보았다. 몇 편의 영화를 보았는지 일일이 세지 않아도 되니 아주 편하다. 3월까지 기록한 모습인데도 바라보고 있으면 가득 찬 기분이 든다. 12월까지 모든 영화를 기록했을 땐 어떤 모습일까. 얼마나 극장에 자주 갈 수 있으며, 올해는 어떤 영화를 가장 사랑하게 될까.
아직 시작의 3월이다. 늦지 않았으니 이 글을 보신 분들도 관심사에서 출발한 기록을 조금씩 시작해 보는 건 어떨까. 거창할 필요는 없다. 기호에 맞게 디지털로 시작해도 좋고 아날로그로 시작해도 좋다. 재밌는 나만의 규칙도 만들어 보자. 기록한다는 건 사랑한다는 말과 같다. 사랑하니까 붙잡고 싶은 거고, 어떻게든 붙잡아 두고 싶으니 기록하는 거다. 글도 좋고 그림도 좋다. 무엇이든 기록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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