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김시은의 말 대로 ‘다음 소희’의 ‘소희’는 20대 여성 배우라면 누구나 탐냈을 역할이다. 신인이라면 더욱 그렇다. 1, 2부 구성을 하고 있는 장편 영화 중 절반을 소희가 이끌어 간다. 분량도 충분하고, 서사와 감정의 너울 역시 순차적으로 쌓아간다. 촬영 여건만 갖춰진다면 자신의 연기를 시나브로 보여줄 수 있는 작품이었다.
허나 탐이 난다 하여 그걸을 오롯하게 취하는 건 쉽지 않다. 큰 것을 담으려면 그릇 역시 충분해야 한다. 배우에겐 캐릭터를 소화할 연기력을 뜻한다. 그만큼 신인에겐 부담이 큰 지점이다. 소희는 작품에서 점차 자신의 색채를 잃어간다. 저수지에 비친 윤슬 마냥 하얗게 바래 진다. 숨만 쉬어도 어여쁘고 찬란하게 빛나는 20대의 배우에겐 표현하기 어려운 희미한 회색빛이다.
김시은이 끌고 간 1부의 배턴을 받아 드는 건 대선배 배두나다. 자연스럽게 비교가 이뤄지는 구성이다. 나아가 소희는 실제 있었던 사건의 피해자였다. 시사 프로그램 ‘그것이 알고 싶다’에서도 심층 보도한 바 있다. 작품이 품고 있는 메시지도 무겁고, 직설적이다. 허나 대단한 해답이 있는 것도 아니고, 개선책을 제시할 수도 없는 사회적 모순을 다룬다.
탐스럽지만 함부로 손대기 힘든 ‘다음 소희’를 맛있게 씹어 먹은 배우가 바로 김시은이다. 신예이지만 벌써 칸국제영화제에 얼굴을 비췄고, 부산국제영화제도 다녀왔다. 그런 그를 수식하는 단어는 ‘괴물 신인’. 배우 인생에 받아 들기 힘든 타이틀, 그럼에도 딱 어울리게 소화 중인 김시은과 한류타임스가 지난 2일 서울시 종로구 소격동의 한 커피숍에서 만났다.
필모그래피에 새겨 넣은 소중한 작품 ‘다음 소희’를 본 소감은 어땠어요?
처음 ‘다음 소희’를 본 건 칸이었어요. 그땐 영화에 한국 정서가 많이 들어갔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해외 관객이 공감하지 못할까 걱정도 많이 했거든요. 그런데 많이 울고, 웃어주고, 공감도 해주셨어요. 거기서 든 생각이 ‘아, 이게 우리나라만의 문제는 아니구나, 해외에도 다른 소희가 있구나’라는 거였어요. 영화 끝난 후에 절 만난 관객들이 “살아있어줘서 고마워”, “우리도 그런 경험이 있어”라고 말해주는데, 그래서 그 생각이 더 피부로 와닿았던 것 같아요.
캐스팅 과정이 궁금해요.
제가 ‘너와 나’라는 영화를 촬영했는데 그곳 조감독님이 시나리오를 보내주셨어요. 받자마자 읽었고, 읽자마자 답변드렸죠. 오디션도 굉장히 빨리 잡혔던 기억이에요. 그때 전 연기를 준비해서 갔었는데, 감독님과 대화를 나누고 왔어요. 그때 이 시나리오가 실화 모티브라는 걸 알았고요. 거기서 ‘아 나도 모르고 살았는데, 이 사건을 모르는 사람이 또 있겠구나, 이 영화가 만들어진다면 단 한 명이라도 이 사건에 관심을 갖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배두나 씨가 먼저 캐스팅이 돼있었죠?
네. 배두나 선배님이랑 하는 걸 알고 있었고, 너무 좋았지만 그걸 이야기하진 않았어요. 그리고 ‘감히 내가 할 수 있을까?’라는 걱정도 있었고요. 제가 1부를 이끌어서 2부로 넘겨야 했으니까요. 그리고 많은 분들이 정주리 감독님과 배두나 선배님의 재회에 관심을 두실 것도 알고 있었어요.
그럼에도 잘 해낸 거죠.
많이 고민한다 해도 답은 하나였어요. 어차피 잘 해내야 하는 미션이였죠. 그렇게 부담을 떨치고 소희를 연기한 거 같아요. ‘다음 소희’라는 작품은 20대 여배우라면 누구나 탐을 낼 영화였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잘 해내겠다는 욕심이 컸고요. 이걸 해내야 다음 단계로 나아갈 수 있다고 계속 제 자신과 다짐했어요.
김시은이 소희로 변해가는 과정은 어땠을까요?
시간의 흐름에 따른 소희의 변화를 전달하고 싶었어요. 소희의 감정과 관객의 마음이 맞닿고, 그렇게 흘러갔으면 좋겠다는 바람이었죠. 작은 것들도 신경을 써봤어요. 콜센터 직원을 연기하면서도 처음엔 말을 또박또박 하려고 노력하는 딕션에서 나중엔 로봇처럼 읊고 있는 딕션으로 차이를 두려고 했죠. 굉장히 연습을 많이 했던 부분이에요.
자신의 마음이 소희와 맞닿았던 때를 언제 느꼈나요?
제가 평소 눈물이 많은 편은 아니에요. 그런데 콜센터 성희롱 장면에서 눈물이 나왔어요. 소희도 잘 우는 친구가 아니잖아요. 그런데도 눈물이 자연스럽게 나오는 거에 소희와 가까워졌다는 걸 느꼈죠. 그때부터 “사랑합니다. 고객님”이라고 말하는데 숨이 턱 막히더라고요.
콜센터 공간, 너무 현실적이라 저 역시 숨이 턱 막히더라고요.
콜센터 직원 분들도 다 배우들이셨어요. 정말 열심히 연기하시고 도와주셔서 저 역시 소희에 더 깊숙하게 들어갈 수 있었죠.
소희에게 깊숙이 다가갈수록 심리 케어가 필요했을 것 같은데요?
감독님이 말씀이 많은 편이 아니신데, 그땐 제가 몰입이 됐다는 걸 아셨나 봐요. 그때 “넌 현장에서만 소희이면 돼”라고 말씀 해주셨어요. 제가 현장에서 전적으로 믿을 수 있는 건 감독님 한 명이었는데, 그 분이 정답을 말씀해주신 거죠. ‘아 바깥에서는 나로 지내도 되는구나’라고 생각하게 됐어요. 그때까지만 해도 전 늘 소희에 대해서 생각하려고 했어요. 그래야 우리 영화가 잘 될 거라고 생각했고요. 그런데 그 말씀을 들으니 해소가 됐던 것 같아요. 그때부터 소희와 저를 분리하려고 노력했어요.
실제 사건이기에 마음이 더 쓰였을 수도 있어요.
사실 제가 찾아볼 수 있는 정보는 많았어요. ‘그것이 알고 싶다’도 있고, 기사도 많이 나왔으니까요. 하지만 일부러 찾아보진 않았어요. 조심스럽기에 그랬던 것도 있고요. 그분에 대해 제가 알아가는 만큼, 연기가 제한될 것 같았어요. 그래서 시나리오 안에 있는 소희만 바라보려고 했어요.
안타까운 사건이죠. 그런데 여전히 우리 세상은 다음 소희를 만들고 있어요.
전 2부를 영화가 다 먼들어진 후에 봤어요. 소희 사건에 대해 아무도 책임을 지려 하지 않는 것에 너무 화가 났죠. ‘과연 나라면 저 상황에 어땠을까’라고 자신에게 물어도 봤고요. 이게 개인이 해결할 수 있는 건 아니라는 생각도 했어요. 사회가 변해야 하는 거겠죠. 하지만 개인이 변해야 사회도 변한다고 생각해요.
그러면 ‘다음 소희’가 그 변화를 이끌 수 있을까요?
개선이 됐으면 좋겠고, 위로도 됐으면 좋겠어요. 하지만 어렵겠죠? 제가 칸에서 느꼈던, 전 세계적인 문제라는 걸 가늠하면 몇 명이 바뀐다고 세상이 바뀔 거 같진 않아요. 그럼에도 무언가를 느끼고, 조금이나마 변화를 시도한다면, 그게 모여 조금씩 더 큰 변화가 될 수도 있을 거예요. 그래서 우리 영화가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다가갔으면 좋겠어요.
다음 소희는 언젠가 없어질까요?
전 소희가 우리 사회에서 사라질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너무 안타깝지만 현실이고, 그래서 우리 영화가 위로가 됐으면 하는 거고요. 제가 작품의 2부는 영화가 다 먼들어진 후에 봤어요. 소희 사건에 대해 아무도 책임을 지려 하지 않는 게 너무 화가 났고요. ‘과연 나라면 저 상황에 어땠을까’라고 물어도 봤고요. 이게 개인이 해결할 수 있는 건 아니라는 생각도 했어요. 사회가 변해야 하는 문제죠. 그래도 ‘다음 소희’를 소개하는 뉴스가 나왔는데요. 그러면서 사건이 재조명이 됐어요. 거기에서 ‘이것이 영화의 힘이구나, 조그마한 움직임이 시작되는구나’라는 희망을 보기도 했어요.
권구현 기자 kkh9@hanryu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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