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이동휘는 영화계에서 작가로도 불린다. 단순히 연기를 잘하는 것을 넘어서 대본이 다 써내지 못한 무언가를 찾아내서다. 글을 바탕으로 배우가 할 수 있는 다양한 상상을 연기로 구현한다. 찍을 때마다 새롭게 연기하는 방식을 택한다. 그 연기가 배우의 능력을 드러내기 위함이 아니라, 연출가가 편집할 때 딱 맞는 것을 제공하기 위함이다. 덕분에 연출가는 기분 좋은 고민에 빠진다.
그만큼 대본을 분석하는 능력이 탁월한 배우로 평가된다. 캐릭터에 대한 이해도 깊고, 상황에 따른 시야도 넓은 편이다. 웃길 때는 마음껏 웃기면서, 그 안에 인간의 보편성을 담아낸다. 연출가는 만족도가 높다.
신작 ‘어쩌면 우린 헤어졌는지 모른다’(이하 ‘어우헤’)는 오랜 기간 쉬고 있을 때 만난 작품이다. 형슬우 감독과 친분이 있는 영화인이 이동휘를 추천했고, 형 감독은 혹시나 하는 마음에 대본을 넘겨줬다. 얼마 시간이 지나지 않아서 바로 작품에 출연하기로 결정했다. 책이 재밌고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다. 이동휘는 이번에도 매력적인 인물을 구현해낸다.
‘어우헤’에서 이동휘가 맡은 ‘준호’는 이동휘가 가진 이미지에 기댄다. 다소 어리숙하고 선하지만 지질하다고도 볼 수 있는 인물이다. 좋은 게 좋은 거라며 허허실실 웃고 살지만, 내면에는 어떤 상처가 곪아있는 인물이다. 오랫동안 연인을 이어온 ‘아영’(정은채 분)과 살얼음판을 걷는 연애를 하다 헤어진다. 그 이별이 꼭 나쁜 결과라 볼 수 없다. 영화가 끝날무렵에는 준호가 성장한 걸 확인한다. 이동휘는 마치 스며들듯 점차 성장하는 인물을 그려낸다.
그런 가운데 이동휘가 한류타임스와 9일 만나 인터뷰를 진행했다. MBC ‘놀면 뭐하니?’ 전후로 약 2년 6개월 동안 작품을 하지 않았다고 밝혔다. 창피한 작품에 출연하고 싶지 않았다는 그 이유였다. 적어도 의미 있으면서 기발한 작품에서 뛰어놀고 싶었다고 했다. 고심 끝에 선택한 ‘어우헤’는 조금도 후회가 없다고 했다.
“약 1년 가까이 작품을 안 하고 있었어요. 대본을 준 형슬우 감독과 만났어요. 누군지 알고 있었거든요. 재밌는 단편을 많이 봤었어요. 예전부터 재밌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어요. 자고 일어났는데 담이 걸린 상태에서 전 여자친구와 재회한다는 내용이었어요. 듣는 순간 신선했어요”
‘어우헤’의 매력 중 하나는 준호의 성장이다. ‘얘는 생각이란 걸 할까?’라는 의문이 들 정도로 한심하게 사는 사람이다. 고시 공부를 한다고 하지만, 사실 공부에 집중하지는 않는다. 친구들의 무시 섞인 조롱에 “야! 그만 얘기하자”라며 술잔을 기울인다. 어떤 친구는 준호와 대화할 때 에어팟조차 빼지 않는다. 여자친구 아영은 언제나 날이 서 있다. 준호는 슬그머니 넘어가려고만 한다. 여러모로 내몰려 있지만, 심각하게 고민하진 않는다.
그러다 영화 후반부에는 어느덧 성장한 얼굴을 보여준다. 아영과 헤어지고 나서 오히려 자신의 살길을 찾고, 타인과의 관계도 회복한다. 자신감을 찾고 점차 자신의 길로 찾아 나선다. 준호의 변화가 다소 뭉클하게 다가온다.
“어떤 인물이 성장해야 작품이 완성된다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준호는 죄책감이 컸을 것 같아요. 뭔가 더 해줄 것이 없는 무기력함과 미안함이 있고, 더 붙잡을 수도 없어요. 그런 면에 이입을 많이 했어요. 그런 사람들이 얼마나 많았겠어요. 현실적인 고민 때문에 이별하는 커플이 정말 많죠. 아영이에게 잘 보여야지는 아니더라도, 잘 살고 싶은 의지는 있었을 거라고 봐요. 아영이랑은 엇박이 나서 헤어진 거고, 좋은 사람으로 보여야겠다는 마음은 없었어요”
‘어우헤’는 이별에 대한 하이퍼 리얼리즘이 담겨 있다. 오래 사귄 커플의 오래된 감성이 이동휘와 정은채를 통해 표현된다. 워낙 오래 본 사이라, 더 강하고 아픈 말을 던진다. 조금도 흔들림 없는 직구를 상대방 가슴에 꽂는다. 땅에 발을 붙이고 있는 느낌의 이동휘의 외형과 마치 하늘을 날아다니는 것 같은 정은채의 외형이 그럴 듯하게 잘 어울린다.
“캐스팅이 신선하다고 느꼈어요. 은채 씨는 고급스럽고 초상화에서 걸어 나온 느낌이잖아요. 우아하고요. 저만의 연관 검색어예요. 준호는 대신 짜증을 유발하는 현실적인 인물이에요. 아영은 돈도 잘 벌고, 도전도 하고 사회적 가면도 잘 갖추고요. 집에 돌아오면 준호가 있어요. 그 균열이 재밌을 것 같았어요. 잘 어울리는 조합이었다면 오히려 이야기가 달라졌겠죠. 정은채와 저의 생경한 느낌이 이 영화 톤하고 잘 맞은 것 같았어요”
이동휘의 재주 하나가 신을 풍성하게 만드는 점이다. 흔히 말하는 ‘재미없는 신’ 혹은 ‘지나가는 신’에서 묘한 재주를 부린다. 캐릭터에 맞게 춤을 추며 입장하거나, 상황과 맞아떨어지는 애드리브를 구사한다. 대사를 만들기도 하고, 새로운 상황을 만들기도 한다. 리액션이 풍부한 배우다. 단역부터 시작한 그의 경험이 바탕이 됐다.
“아마 단역부터 조연까지 다 경험해봐서 그럴 거예요. 무명 때 같은 영화를 여러 번 봤어요. 이야기를 먼저 보고, 조연 보고, 단역도 쪼개서 봤어요. 영화를 스승님이라 생각하고 봤어요. 조연들은 주인공이 대사할 때 어떻게 빈 공간을 채우는지 봤죠. 거장의 영화는 단역마저 빛나요. ‘나를 찾아죠’에서 벤 에플랙에게 '사진 찍자'고 하는 여자는 아직도 잊혀지지 낳아요. 거장은 단역 한 명까지도 신경 써요. 전 그렇게 판단해요. 우리나라 최고봉은 봉준호 감독님이죠. 그렇게 영화를 다루는 사람을 좋아해요. 그래서 저도 그렇게 쓰여지길 바라요. 서포트 지점을 잘 찾아서 토스를 잘하고 싶어요. 이제는 이상한 강박까지 생기긴 했어요”
이번 작품에선 어떤 공간을 채워넣었을까.
“배드민턴 칠 때인데요. 한국 영화 역사상 이렇게 배드민턴을 치는 배우는 앞으로도 없을 거라는 마음으로 촬영했어요. 촬영할 땐 정말 만족했어요. 그것 때문에 담이 온 건 아닌가 할 정도로 과격했죠. 나중에는 조금 과한 건 아닌가 싶더라고요”
이 영화의 출발점은 단편이다. 영화의 하이라이트가 되는 담 걸린 준호가 아영과 만나는 장면에서 시작됐다. 아침에 담이 걸린 채 일어난 준호는 그 상태로 버스를 타고 꽤 오랜 시간을 걸어 아영을 만난다. 아영을 만나서도 그는 왼편을 바라보고 있다. 단편의 제목은 ‘왼편을 보는 남자’였다.
“찍을 때 감독님에게 ‘이거 정말 말이 되냐’고 했어요. 담이 걸려도 이렇게 걸리지는 않잖아요. 버스에서도 그렇고요. 뛰어갈 때도 왼쪽만 보면서 뛰는 건 아니지 않냐고 했는데, 감독님이 확실히 그런 경험이 있다고 하더라고요. '알아서 하겠거니' 하고 연기했죠. 웃긴 상황인데, 준호 입장에서는 비극이잖아요. 긴장되고요. 그게 인생인 거 같아요. 인생이 곧 유머인데, 유머가 없으면 의미가 없는 것 같아요. 인생이 코미디잖아요. 들여다보면 힘든 상황인데, 그 상황에서 코미디가 발생하는 것처럼요”
영화는 인생의 축소판이다.
“그래서 제가 영화를 하는 것 같아요. 현실적인 것에 비현실이 한 스푼 들어간 영화를 즐겨요. 그 생경함이 좋죠. 인생을 축소판으로 보여주는 게 영화잖아요. 그런 역할을 맡아서 연기하는 건 정말 행복하죠. 그런 인물을 맡아서 스펙트럼이 넓게 표현하는 배우이길 원해요”
이동휘는 작품에서 주로 감초로 활약했다. 공기가 무거운 작품에서 웃음으로 숨통을 틔었다. 디즈니+ ‘카지노’에서도 이동휘가 분위기를 전환한다. 그것이 희열을 준다고 한다.
“숨통을 틔우는 것에 강박이 있나봐요. 심각하게 보고 있다고 갑자기 웃음이 피는 것에 관심이 많아요. 언젠가는 자제를 해야겠죠. 제가 ‘원라인’ 찍고 극장에서 몰래 봤어요. 사람들이 ‘개그콘서트’ 보는 것처럼 웃더라고요. 당시에 제가 정말 자유롭게 연기했거든요. 저를 보고 웃는 모습에 희열을 느꼈어요. 나를 보고 행복해 하는 모습에 ‘왜 이렇게 좋지?’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 희열은 ‘브로커’에서도 이어진다. 극 중 ‘송씨’로 출연한 이동휘는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으로부터 대사를 만들어오라는 요구를 받는다. 오랜 고민 끝에 잠을 2시간 자가며 만든 대사는 감독으로부터 지지를 받는다.
“대사를 만드는데 너무 부담이 됐어요. 다음날 아침에 만들어서 보여드리는데 감독님이 떼굴떼굴 굴르시더라고요. 대사 하나 때문에 잠 못잤던 신인 때의 느낌을 받았어요. 그래도 감독님이 웃으셔서 기뻤죠. ‘내가 웃길 수 있구나’라는 확신을 얻은 것 같아요. 프랑스에서도 반응이 좋았다고 하더라고요. 자신감이 없던 시절이었거든요. 너무 오랜 시간 쉬어서요. 다시 자신감을 찾았죠. 그때 느낀 거 같아요. 나는 남들이 못 찾는 걸 찾고, 할 수 없는 걸 하는 배우라는 걸요. 스트레스가 심했었거든요. 제가 작가도 아닌데, 매번 그런 걸 준비했으니까요. 이제는 행복해요”
감초 뿐 아니라 이동휘는 진지한 역할도 매우 잘 흡수한다. 저예산 영화 ‘국도극장’이나 넷플릭스 ‘글리치’에서 그는 웃음기를 뺀다. 웃음을 뺀 이동휘는 오히려 더 매력적이다.
“그래도 시간이 많이 걸릴 것 같아요. 저예산 영화를 참여하는 게 그런 역할을 맡을 수 있기 때문이기도 해요. 정극에서는 진지한 역할이 꽤 오래 걸릴 것 같아요. 아무래도 제가 ‘응답하라 1988’로 사랑을 받기 시작했잖아요. 뭐가 되더라도 저는 잘 쓰이는 배우가 되고 싶어요. 성실하게 잘 여물고 있다는 걸 보여드리고 싶어요. 그러면 감사할 것 같습니다. 세상에선 그리 드라마틱한 일은 잘 일어나지 않더라고요. 저는 그래도 ‘응답하라 1988’도 있고, ‘극한직업’도 있잖아요. 대중이 그렇게 좋아할 작품에 여러 번 출연했어요. 커리어에 방점을 찍은 작품을 하나도 하기 힘든데요. 저는 그것만으로 감사합니다”
사진=안성진 작가
함상범 기자 hsb@hanryu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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