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테랑 배우 김현주의 롤은 대체로 참하고 활달한 범주 안에 있었다. 기본적으로 선한 이미지에 잘 웃고 밝은 여성과 특히 잘 어울렸다. OCN ‘왓쳐’ 이후로 스릴러 장르에서는 주로 정의롭고 선한 얼굴로 대중과 만났다. 넷플릭스 ‘지옥’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가 맡은 ‘민혜진’은 불의에 저항하는 변호사다. 아무래도 악하거나 강한 인상보다는 선하고 정의로운 포지션이 김현주에게 맞는 옷에 가까웠다.
그런 김현주가 전쟁 영웅이자, 로봇이 됐다. 전쟁을 승리로 이끈 한국의 ‘잔다르크’ 같은 인물이다. 연상호 감독의 넷플릭스 영화 ‘정이’를 통해서다. 로봇이라 대체로 감정이 옅고, 독특한 표정을 지어 기존에 보지 못했던 새로운 얼굴을 보여준다. 게다가 강렬한 액션까지 선보인다. 김현주에겐 커다란 변신이 아닐 수 없다.
영화 ‘정이’는 지구가 망가진 2355년, 우주에 새로운 거처를 마련한 인류가 영토 싸움을 한 이후가 배경이다. 연합군과 아드리안 사이에 큰 전쟁이 있은 후, 휴전 중일 때 연합군은 전쟁 영웅 ‘정이’(김현주 분)의 뇌를 복제해, 최강의 전투 요원을 만들어 다시 전쟁을 치루려 한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정이는 실험을 할 때마다 결정적인 순간에 계속 죽음을 맞이한다. 정이의 진화를 맡은 연구원이 정이의 딸 ‘안서현’(강수연 분)이다.
한국판 SF장르인 ‘정이’는 인간성이라는 근원적인 질문을 던진다. 인간의 뇌를 복제한 로봇은 과연 인간인지, 인간성을 잃은 인간을 인간이라 할 수 있는지, 감정이 있는 로봇은 로봇인지 등 철학적으로 접근한다. 그 중심에 정이를 연기한 김현주가 있다.
그런 가운데 한류타임스가 지난 25일 김현주와 만나 인터뷰를 진행했다. 기존에서 벗어난 연기톤으로 변신에 시도한 김현주는 여러 면에서 만족하는 모습이었다. 한류타임스는 연기자로서 새로운 도전에 나선 김현주의 속마음을 일문일답으로 펼쳐본다.
연상호 감독이 ‘지옥’ 촬영 중에 ‘정이’를 구상했다고 들었는데, 제안을 어떤 시기에 받았는지?
‘지옥’ 촬영 중에 ‘정이’에 대한 구체적인 이야기는 안 했어요. ‘지옥’ 때 급하게 작품에 임해서 액션도 미흡했고, 개인적으로는 만족스럽지 못했어요. 시즌2 결정되기 전에 “‘지옥2’가 나오면 더 잘할 것 같다면서 믿어달라”고 했어요. 그러니까 감독님이 “민혜진 총 들게 할 건데요?”라고 하더라고요. ‘민혜진이 어떻게 총을 쓰지?’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정이’를 얘기한 게 아닌가 싶어요. 시점은 잘 기억이 안 나는데, 지옥 마지막 촬영 무렵이었던 것 같아요. 그때 유독 강수연 선배 이야기를 많이 했어요. 아마 그때 이미 어느정도 구상이 돼지 않았나 싶네요.
연 감독은 액션 감각이 오른 상태여서 김현주를 캐스팅했다고 하던데, 스스로 봤을 때 어느 정도였는지?
액션은 하다 보니까 늘더라고요. ‘지옥’ 끝날 무렵에는 기술적으로 많이 늘어난 상태였어요. 그쯤에 작품을 마쳤죠. 어떤 배우든 맡으면 잘 하겠지만, ‘정이’는 ‘지옥’에 비하면 기간이 길었던 편이에요.
액션 면에서 ‘지옥’과 비교하면 어떤가요?
나은지는 잘 모르겠네요. 더 새롭고 파워풀한 면은 필요했어요. 그래서 보강도 많이 했고요. 수트도 무게가 있어서 관절이 유연하지 못했어요. 체력이나 유연성도 많이 요구됐죠. 열심히 하긴 했어요.
‘정이’ 첫 시퀀스가 상당히 멋졌다. 소감을 말한다면?
멋있기는 했어요. 제가 다 한 부분이라고 말하기는 그렇네요. 조명 세트나 CG, 편집이 모두 잘 맞아떨어진 것 같아요. 영화적으로는 만족이 커요. 액션도 액션이지만, 여러 가지 합이 잘 맞은 것 같아요.
액션 경험이 많지는 않은데, 이번 작품에서 새로운 촬영이 많았을 것 같다.
생소한 경험이 많았어요. 특히 액션을 연기할 때 합을 맞추는 게 새로웠어요. ‘지옥’에서도 맞췄었는데, 사람 대 사람이었다면 이번에는 사람 대 로봇이에요. 스턴트맨들도 로봇처럼 싸웠어요. 로봇과 로봇의 싸움이 기존 SF 영화하고는 차별화된 느낌이었죠.
시나리오를 처음 읽었을 때 기분을 말한다면? 부담감도 있었고, 설렘도 있었을 것 같다.
처음에는 마냥 신났어요. 한국에서 이런 장르가 나온다는 것에 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어요. 그 결과가 좋지 않아도, 이런 경험이 레퍼런스가 되겠다고 생각했죠. 또 연상호 감독이 한다고 했을 때 의심이 안 갔어요. 다만, 제가 해야 하는 연기가 쉽지는 않을 것 같았어요. 대본을 읽을 때부터 흥분상태였어요.
기존의 연기에서는 볼 수 없었던 희한한 표정이 많았다. 약간 크로테스크하기도 했다.
복잡하게 생각하지는 않았어요. 연기를 멈추는 동작이 쉽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괜찮았어요. 거울보고 연습 많이 하고 그랬죠. 보시는 분들이 생각하는 것보다는 복잡하지 않았어요.
고민이 된 포인트가 있다면?
걸을 때도 그렇고 전체적으로 고민은 많았죠. 이등병처럼 걷잖아요. 팔과 다리를 같이 올릴까도 아이디어가 있었어요. 멈출 때 기괴한 표정을 지으려고도 했고요. 의도하지 않은 순간에 멈추는 거니까요. 그 스틸을 잡으려고 고민이 많았어요.
이번에 맡은 정이는 감정이 없다.
저는 정이를 세 가지로 봤어요. 사람인 정이, 동작이 멈춘 실험대상, 사람이 없는 기계의 정이요. 감정이 없다기보다는 옅죠. 액션에도 감정이 있다고 여기고 연기했어요. 노란불이 뜰 때는 액션이 더 강해지잖아요. 감정이 섞여있죠. 기계 정이는 기억이 지워진 거지, 뇌에는 여전히 감정이 있어요. 감정이 적을 뿐이라고 생각해요.
물론 대사량도 적었고, 매 신마다 감정을 드러내는 연기는 아니어서 생소하실 것 같긴 해요. 과거랑 다르긴 하죠. 그래도 몸을 쓰는 과정이 재미있었어요. 개인적으로 몸을 쓰기 위해 준비하는 과정이 재밌더라고요. 결과물을 봤을 때 만족도가 있기도 하고요. 정성을 쏟은 느낌이었고, 그런 점에서 성취감이 더 컸던 것 같아요.
긴 호흡의 연상호 감독과 짧은 호흡의 연상호 감독은 차이점이 있을까.
드라마 같은 경우에는 100% 다 준비가 되지 않았어요. 사전 준비가 완벽할 수는 없었어요. 드라마 사이에 대사를 넣기도 했어요. 영화는 SF다보니 100% 모든 게 준비되지 않으면 촬영을 할 수 없었어요. CG도 많이 입혀줘야 하기 때문에 뭐든 약속이 돼 있어야 했어요. 그 차이가 있을 것 같네요.
故 강수연 덕분에 긴밀한 유대관계를 형성할 수 있었다고 들었다.
‘지옥’ 때는 연 감독과 아주 친근하게 지내지 않았어요. 나이대가 비슷해서 더 어려웠어요. 더 예의 차리는 관계라고 해야 될까요. 주로 배우 박정민과 함께 했고, 둘이 대화를 나누면 저는 경청하는 입장이었어요. 출연배우가 많기도 했고, ‘지옥’은 영화 시스템으로 했는데 오랜만의 영화 현장이어서 적응하는 데 시간이 걸렸어요.
‘정이’는 출연자가 적었어요. 저랑 류경수, 강수연 선배였죠. 저희끼리 같이 있는 시간이 많았어요. 강수연 선배가 모임을 좋아하니까, 자주 모였죠. 영화 얘기도 하고, 서로 관심사 얘기도 하고 많이 웃고 떠들었어요. 대화를 많이 할 수밖에 없는 현장이었고요. 선배님이 없었다면 아마 그런 분위기는 안 만들어졌을 거예요. 제가 그런 자리를 먼저 나서서 만드는 사람도 아니고요. 선배님 덕분에 넷이서 같이 친해졌어요. 이번에 홍보 활동을 하면서 제가 연 감독과 경수를 많이 의지한다는 걸 알게 됐어요. 수연 선배님이 좋은 두 사람을 선물로 주신 것 같아요.
2014년 무렵부터 몇 년간 공백기가 있다. 무엇을 한 거냐.
2015년에 작품을 하긴 했는데, 뭔가 두드러지지 않았다는 얘기겠죠. ‘왓쳐’ 때는 회사가 바뀌었어요. 회사가 바뀔 때 제 욕구를 강하게 어필했어요. 혼자서 이끌어가는 자굼을 많이 했는데, 같이 어우러져서 작품을 하고 싶다고 말했어요. 좋은 작품에 참여라도 했으면 좋겠다고 했죠. 그런 생각을 하는 순간 시야가 넓어졌고, 작품 스펙트럼도 커졌어요.
왜 그런 생각을 하게 됐을까.
전환의 시기가 30대 후반쯤부터였던 것 같네요. 늘 주인공만 했어서 부담이 있었던 것 같아요. ‘지옥’도 그런 생각의 전환이 없었다면 고사했을 수 있어요. ‘왓쳐’가 들어오고, ‘왓쳐’를 한 이후에는 스릴러 장르 작품이 많이 들어왔어요. ‘지옥’을 수락한 이유가 감독이 궁금해서 였어요. 이 감독은 왜 나에게 액션이 있는 역할을 주려 하는지 궁금했어요. 배우가 많아서 융화가 잘 될지도 궁금했고요. 염려되는 게 많았었죠. 그래도 믿고 해봐도 괜찮겠다 싶어서 했는데, 좋은 도전이 됐던 것 같아요.
많은 배우가 해외에서 활약 중이다. 비슷한 시기에 데뷔한 배우들이 큰 활약을 하고 있는데, 보고 있으면 어떤가. 김현주도 충분히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다른 배우들의 활약은 좋은 일이죠. 좋은 영향력을 갖고, 그것이 후배들에게도 좋게 작용할 거 같아요. 매체가 다양해지면서 저도 이득을 많이 봤죠. 그렇다고 제가 그 분들처럼 될 거라는 생각은 안 해봤어요. 아직 외국에서 오퍼가 들어온 것도 아니고요. ‘정이’ 역시 저 혼자 한 것도 아니고, 무수히 많은 스태플의 공이 들어간 결과잖아요.
만약 제안이 온다면?
제안이 온다면 참여는 하고 싶죠. 그렇지만, 그런 의도를 갖고 연기하지는 않았어요. 이런 비슷한 질문을 많이 받지만 체감은 안 돼요. 세계인이 보는 게 제 일상까지 연결은 되지 않아서요. 그냥 하던대로 하고 있어요.
만약 이런 기회가 20대 때 있었다면 어땠을까.
액션은 발도 더 많이 올라가고 힘도 더 있었겠죠. 근데 어렸기 때문에 연기를 더 잘했을지는 모르겠어요. 오히려 액션을 안 하던 시간이 길어서, 그 갈증 덕에 해소하고 싶은 마음으로 의지나 열정이 더 컸어요. 흘러가는대로 두는 게 제일 좋은 것 같아요. 다 때가 있는 것 같고요. 어렸을 때 세계1위 했으면, 지금이랑은 또다른 마음으로 받아들였을 것 같아요.
작품 보는 기준이 어떻게 될까. 다양한 이야기와 장르에 출연하는 것 같다.
그냥 꽂히는 거를 해요. 이 캐릭터는 내가 표현해야 할 것 같다는 느낌이 들면서, 스스로 확 빨려 들어가는 작품을 해요. 직관에 의존하죠. 그 인물을 만났을 때 책만 읽어도 그림이 싹 그려지는 게 있어요. 그러면 하게 돼요.
‘정이’는 어떤 작품으로 남을까?
저는 이 작품을 주관적으로밖에 볼 수 없어요. 온전한 마음으로 보여지지 않아요. 이 작품은 특별해요. 제가 출연했지만, 냉철하긴 쉽지 않아요. 객관적인 건 이미 틀렸어요. 저는 ‘정이’가 애틋하고, 더 사랑을 받았으면 해요. 결과는 연연하지 않아요. 따라와 주는 거죠.
강수연 선배님도 오랜만에 복귀하는 작품이어서 걱정도 많았어요. 고민도 많이 했고요. 철없이 웃고 떠들었던 추억이 많이 떠올라요. 아마 선배님도 힘들었을 것 같아요. 생소한 촬영이고, 많이 궁금해 했어요. 그걸 못 보여드린 게 매우 아쉽네요.
사진=넷플릭스
함상범 기자 hsb@hanryu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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