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들, 어떻게 살 것인가
지난 7월, 일본 애니메이션 영화의 거장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이 10년 만에 신작 장편영화를 공개했다. 은퇴 선언을 번복하고 내놓은 것으로, 80세가 넘은 그에게는 혹시나 마지막 작품이 될 수도 있다. 작품은 이례적이게도 ‘슬램덩크 방식’이라며 사전에 그 어떤 홍보도 진행하지 않았고, 줄거리나 출연자가 전혀 공개되지 않은 채 개봉 첫날을 맞이했다. 개봉 전 관객들이 유일하게 알 수 있었던 건 제목이 〈그대들,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것. 일본인이라면 다들 알고 있는 동명의 책과 관계가 있을 것이라는 추측만 가능했다.
사실 한국인에게 〈그대들,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제목은 상당히 낯설 터다. 이 책은 1937년 요시노 겐자부로가 쓴 소년 문학이다. 일제강점기가 끝나갈 무렵으로, 일본 본토 역시 군국주의적 분위기가 짙어져가던 시기에 나온 책이다. 천문학자 코페르니쿠스의 이름에서 유래된, ‘코페르’라는 별명을 가진 중학생 혼다 준이치가 친구들과의 우정과 갈등을 통해 성장해가는 모습을 담고 있다. 매우 교육적이고 계몽적인 내용인데, 세상에 나온 지 80여 년이 지난 지금도 꾸준히 판매되고 있으며 교과서나 입시 문제에도 종종 등장해 일본인들에게는 매우 익숙하다. 전혀 다른 줄거리지만 인지도로 비유하자면, 한국의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 정도이지 않을까 싶다.
인기가 높았던 만큼 발간도 출판사 세 곳에서 이뤄졌다. 판매량도 높다. 이와나미 문고에서 나온 것만으로도 7월 기준 누적 180만 부가 판매됐다. 2017년에는 만화책으로 출간되어 무려 250만 부 판매라는 대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한국에서도 2012년 발간됐으며, 중국어와 영어, 포르투갈어까지 다양한 언어로도 번역되었다.
나는 저자 요시노 겐자부로의 손자다. 덕분에 미야자키 감독과 만나 어디서도 들을 수 없는, 작품에 대한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부편집장을 맡고 있는 〈아사히신문〉 산하 온라인 매체 ‘Kosho-Kojitsu(好書好日)’에 해당 내용을 일부 전했다. 그러나 ‘Kosho-Kojitsu’에는 담지 못한, 책에 얽힌 한국과의 소중한 인연도 있다. 기회가 닿아 〈에스콰이어 코리아〉를 통해 한국 독자들에게 작품과 책에 관련된 좀 더 깊은 이야기를 전한다.
미야자키 하야오
2017년 10월 말의 이야기다. 미야자키 감독은 한 토크쇼에 출연해 갑자기 다음 작품의 제목이 〈그대들, 어떻게 살 것인가〉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야말로 빅 뉴스였다. 화제가 되어 이 소식을 전해 들은 나와 아버지는 깜짝 놀랐다. “아니, 그런 이야기는 처음 듣는데?” 당황하고 있을 무렵 스튜디오 지브리에서 연락이 왔다.
보름쯤 지난 11월 중순의 어느 날, 아버지와 나는 도쿄 교외에 위치한 스튜디오 지브리를 방문해 미야자키 감독과 마주했다. “아직 발표할 때는 아니었는데, 무심코 말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렇게 말하며 미야자키 감독은 우리에게 사과했다.
앞서 미야자키 감독은 지난 2013년, 〈바람이 분다〉를 끝으로 장편영화 제작에서 은퇴하겠다고 선언했다. 〈그대들, 어떻게 살 것인가〉의 제작 의사를 밝힌 게 큰 화제가 된 건, 그가 자신의 은퇴 선언을 철회한 뒤 처음으로 다음 작품에 대해 언급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오랫동안 피해왔던 것’을 똑바로 마주해야 한다는 생각에 도저히 은퇴할 수 없었다고 말했다. “바로 ‘자기 자신’이 주제인 작품이죠. 그 주제를 다루지 않고 끝낼 수는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날 미야자키 감독은 자신의 소년 시절에 대해 이야기했다. “화려하고 성격이 밝은 소년이 주인공인 작품은 몇 개 만들었지만, 저는 그런 소년이 아니었거든요. 아주 우물쭈물, 당당하지 못한 소년 시절을 보냈어요.” 그러면서 그는 많은 소년의 내면에는 온갖 종류의 감정이 섞여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중에는 아름다운 것도 있겠지만, 굉장히 추한 것도 있다는 말이었다. “달리기도 느리고, 다른 사람에겐 결코 말할 수 없는 부끄러운 것들을 마음속에 많이 숨기고 있는 소년이 주인공인 이야기를 만들어보고자 했습니다.” 그 이야기를 통해 미야자키 감독은 무엇을 보여주고 싶은 걸까. “소년의 안에 담긴 여러 가지, 아름다운 것도 있지만 물론 어디에도 보여줄 수 없는 추한 감정과 또 갈등도 있겠죠. 그 모든 것을 온몸으로 받아들이고 힘차게 넘어갈 수 있을 때, 드디어 세상의 문제들과 마주할 수 있는 ‘자기 자신’이 완성된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습니다.”
그렇다면 그 주제를 담은 이야기와 〈그대들, 어떻게 살 것인가〉는 어떻게 연결되는 것일까. 미야자키 감독은 초등학생 시절 교과서에 실린 〈그대들, 어떻게 살 것인가〉의 도입부를 읽고 큰 감명을 받았고, 이후 책을 구입해 단숨에 읽었다고 말했다. 그는 세상의 문제들을 마주할 수 있는, 단단한 ‘자기 자신’을 다룬 이야기를 구상하며 다시 이 책을 떠올렸다. 스튜디오에 그 시절에 읽었던 오래된 책을 가져와 젊은 스태프들에게 일독을 권했다. 스태프들은 “80여 년 전의 책인데도 이 책의 메시지는 지금도 유효하다는 게 신기하다”며 호평했고, 영화 제목을 결정할 때에도 스태프들이 먼저 〈그대들, 어떻게 살 것인가〉를 제안했다고 한다.
영화 속에서 책 〈그대들, 어떻게 살 것인가〉는 두 번 나온다. 영화 초반부와 마지막 장면이다. 미야자키 감독은 제작 초기 단계에서 이미 이 장면을 구상했다고 한다. “주인공의 변화를 불러오는 계기가 되는, 그런 소재로 책이 등장할 계획입니다.” 그가 당시 나와 아버지에게 한 말이다.
이 작품에 대한 미야자키 감독의 설명을 직접 들을 기회는 다시 오지 않았다. 이 작품의 홍보가 ‘슬램덩크 방식’으로 이뤄지는 바람에 감독 역시 그 어떤 매체와도 인터뷰를 진행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당시의 대화가 ‘독점 인터뷰’가 될 줄은 그때는 생각도 못 했던 일이다.
소년의 성장
미야자키 감독의 이야기를 듣고 영화를 보면, 이 영화가 그의 소년 시절을 모델로 했다는 점이 이해가 된다. 여기서부터는 영화에 대한 내용이다. 스포일러는 배제했으나, 혹시나 우려되는 독자라면 다음 중제부터 읽어도 된다.
미야자키 감독의 초대로 나는 영화로 완성된 〈그대들, 어떻게 살 것인가〉를 개봉 5개월 전인 지난 2월에 미리 볼 수 있었다. 극비리에 열린 시사회에 초대받은 셈이었다. 영화는 책과는 완전히 다른, 미야자키 감독의 오리지널 스토리였다. 주인공은 소설의 주인공 ‘코페르 군’이 아니라 ‘마키 마히토’라는 소년이며, 배경은 제2차 세계대전 중인 1944년의 일본이다. 미국의 공습으로 어머니를 잃은 마히토는 이듬해 도쿄를 떠나 지방으로 이사를 간다. 마히토의 가족들을 마중 나온 것은 어머니의 여동생이자 아버지의 새로운 아내가 된 이모다. 새어머니가 된 이모는 이미 마히토의 동생을 임신 중이었으나, 마히토는 새로운 어머니를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다.
이사 온 집의 낯선 방에서 마히토는 책 한 권을 우연히 발견한다. 바로 〈그대들, 어떻게 살 것인가〉. 책에는 ‘커진 마히토에게’라고 쓰여 있다. 생전의 어머니가 성장한 마히토에게 메시지를 남긴 것이다. 마히토는 눈물을 흘리며 이 책을 읽는다.
이사 온 집의 마당에는 이젠 폐허가 된 탑이 서 있다. 어머니의 큰할아버지가 오래전에 지은 것이라고 했다. 어느 날 마히토 앞에 “어머님이 부르고 있어. 아직 죽지 않았어”라며 인간의 말을 하는 왜가리가 나타난다. 마히토는 왜가리에 홀린 듯 이끌려 탑으로 들어가게 된다.
여기서부터 미야자키 애니메이션의 집대성이라 할 수 있는 ‘환상 월드의 대모험’이 펼쳐진다. ‘소년의 갈등과 성장’이라는 공통의 주제가 있어서 그런지, 미야자키 감독이 할아버지의 책을 의식해 표현한 듯한 장면도 나온다. 책의 주인공 코페르 군은 아버지를 잃은 소년이다. 코페르 군은 아버지 대신 그의 성장을 곁에서 지켜보는 외삼촌과 대화하며 자신의 세상을 넓혀 나간다. 영화 속 마히토에게는 외삼촌 대신 큰할아버지가 있다. 마히토와 큰할아버지의 대화는 코페르 군과 외삼촌의 대화를 떠올리게 한다.
군국주의적 분위기가 짙었던 1930년대에 쓰인 책에는 기성세대가 다음 시대를 만들어갈 소년 세대에게 건네는 메시지가 가득 담겨 있다. 이와 유사하게 영화 속에서 큰할아버지가 마히토에게 하는 ‘너의 손으로 싸움 없는 세상을 만들어달라’는 말은 제2차 세계대전 중에 태어난 미야자키 감독이 차세대에 전하는 메시지일 것이다.
영화 속에는 그런 류의 메타포가 수없이 많았다. 일부는 대놓고 드러나 있지만 또 어떤 것들은 한 번 봐서는 알 수 없을 정도로 꽁꽁 숨어 있기도 했다. 영화를 보는 내내 눈은 아름다운 영상에 고정되어 있었지만, 머릿속으로는 ‘이 장면이 무엇을 의미할까? 그럼 그 장면은?’이라는 분석을 쉴 새 없이 했다. 그러다 보니 2시간 4분이라는 긴 시간도 순식간에 지났다. 요네즈 겐시의 피아노 발라드와 함께 엔딩 크레디트가 오르고, 미야자키 감독의 메시지가 공개됐다.
“보는 동안 뭐가 뭔지 이해가 안 가셨을 텐데요. 솔직히 말하면 만드는 저마저도 그런 부분이 있었습니다.”
관객석 곳곳에서 웃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나 역시 피식 웃음이 나왔다. 영화 내용은 물론, 시사회가 열렸다는 사실조차 함구해야 하는 이례적인 시사회는 이렇게 막을 내렸다.
나의 할아버지
시사회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나는 할아버지를 생각했다. 마히토가 세대를 뛰어넘어 큰할아버지와 대화를 나눴던 것처럼, 내가 할아버지와 만난다면 어떤 이야기를 할 수 있을까?
내가 초등학교에 입학하기도 전의 일이다. 할아버지와는 한 동네에 살았기에 왕래가 잦았다. 놀러가면 책을 읽어주거나 연필로 그림을 그려주시곤 했다. 손자인 나를 대단히 귀여워해주셨던 기억이다. 이미 그 무렵 여든에 가까운 나이였고 언제부턴가 입원과 퇴원을 반복하셨기에, 차츰 만남은 줄어들었다. 결국 할아버지는 내가 초등학교 2학년 때 만 82세로 세상을 떠났다.
할아버지의 삶은 파란만장했다. 할아버지는 30대 시절, 육군 소위로 제대한 직후 공산당원들의 연락을 도와주었다는 이유로 구속되었다. 사상 통제법인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였다. 그 시기 일본의 공산주의자 및 조선의 독립운동가, 평화운동가나 종교인들을 탄압하기 위해 만든 법으로, 이 법령에 따라 고문사 또는 옥사한 사람들의 숫자가 일본에서만 1700여 명에 달할 정도로 악명이 높았다. 할아버지는 군사재판에 넘겨졌으나 운 좋게 사형은 면하고 석방되었다.
그러나 ‘사상범’ 낙인이 찍힌 할아버지는 특별고등경찰의 감시 대상이 되어 직업을 구할 수 없게 됐다. 실업 상태인 할아버지를 도와준 사람이 소설가 야마모토 유조였다. 야마모토 유조는 무려 그 시절에 군 당국에 반대하는 목소리를 높여 ‘불온한 작가’로 여겨졌던 인물이다. 그와 뜻을 함께한 할아버지는 야마모토 유조가 담당하던 소년 문고집 편집을 돕는 일을 하게 됐다. 그 과정에서 할아버지도 몇 권의 책을 썼는데, 그중 하나가 〈그대들, 어떻게 살 것인가〉였다.
전쟁이 끝난 이듬해인 1946년, 할아버지는 대표적인 진보 성향 월간지 〈세계〉의 창간 편집장을 맡으며 냉전 시대 일본의 진보적 언론인으로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할아버지는 언론인으로서 자부심이 컸다. 훗날 경제지 기자가 된 아들, 즉 나의 아버지에게 “권력을 두려워하지 않고, 겸허하면서 당당하게 비판할 수 있도록 항상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한다”고 조언했다는 일화를 통해 이를 알 수 있었다. 물론 나는 그런 교훈을 이해하기에는 너무 어린 나이였지만 말이다.
당연히 자랑스러운 할아버지였지만, 어딜 가도 “할아버지가 참 훌륭한 분이십니다” 같은 말을 듣는 게 약간 부담스럽기도 한 터라 가족 관계를 적극적으로 공개하진 않은 채 살아왔다. 그러나 인생은 예측할 수 없는 것이라, 나도 할아버지,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언론사에 몸담은 기자가 되고 말았다. 가끔 언론인으로서 혼란스러운 순간이 찾아오면 종종 할아버지가 쓴 책들을 찾아 읽곤 했다. 특히 제2차 세계대전 패배로 인한 사회적 혼란 속에서, 언론의 자유를 찾고자 〈세계〉를 창간했던 시기에 쓴 회고록은 시대가 바뀌어도 지켜야 하는 가치와 교훈이 분명히 있다는 가르침을 준다. 일방향이라고 여길 수도 있지만, 이것 역시 나름대로 나와 할아버지의 대화일지도 모른다.
2017년 출간된 〈그대들, 어떻게 살 것인가〉의 만화판이 예상치도 못한 슈퍼 베스트셀러가 되고, 그해 미야자키 감독이 자신의 신작 제목을 〈그대들, 어떻게 살 것인가〉로 정했다고 발표했다. 이후 이어진 미야자키 감독과의 만남, 그리고 영화에 대해 나눈 대화들까지. 지난 5년간 일어난 일들은 마치 이제는 어른이 되었으나 여전히 ‘아낌없는 애정을 주던 할아버지’의 모습밖에 기억하지 못하는 손자를 위해 할아버지가 보낸 뜻밖의 선물인 것만 같았다. 영화에서 마히토를 지켜보는 큰할아버지처럼, 그리고 장래의 아들에게 한 권의 책을 남긴 어머니처럼, 혹시 할아버지도 하늘에서 나를 계속 지켜보며 무엇인가 질문을 던지는 것이 아닐까? 만약 그렇다면, 그 질문에 나는 어떻게 대답할 수 있을까. 바로 지금이야말로 ‘나는 어떻게 살 것인가’를 다시 생각해봐야 할 때는 아닐까.
도쿄의 혼다 군과 서울의 김종철 군
위에서도 이야기했지만 〈그대들, 어떻게 살 것인가〉의 한국어 번역판은 지난 2012년 양철북 출판사를 통해 처음으로 출간됐다. 그렇게 알고 있었다. 유족조차 모르는 또 다른 번역판이 무려 30여 년 전에 존재했다는 것을 알게 된 건 불과 몇 년 전이었다.
2019년의 일이다. 나는 특별한 이유 없이, 부모님 집을 방문해 아직 정리되지 못한 채 쌓여 있던 할아버지의 편지들을 조금씩 살펴보고 있었다. 그 종이 더미 속에서 한 장의 편지가 눈에 들어왔다. 할아버지가 이미 돌아가신 지 꽤 되었던 1988년 12월에 할머니 앞으로 온 편지였다. 보낸 사람은 도쿄대의 교수로, 동아시아 사상사를 전공하고 한국에서 연수 경험도 있는 인물이었다.
그는 편지를 통해 ‘친분이 있는 한국 교수의 아들이 〈그대들,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책을 한국에서 냈다’는 내용을 전했다. 책을 출판한 교수의 아들이라는 사람은 1980년대 초중반에 서울대를 다니다 민주화 운동에 참여해 투옥된 경험이 있다고 했다. 전두환 정권이 막을 내린 1988년, 사회에 나온 그가 작은 출판사를 개업하고 첫 책으로 〈그대들, 어떻게 살 것인가〉를 펴냈다는 설명이었다. 그렇다면 책을 만든 사람은 어떻게 〈그대들, 어떻게 살 것인가〉를 접했던 것인가. 도쿄대 교수는 과거 ‘친분이 있는 한국 교수’에게 자신이 감명 깊게 읽은 이 책을 선물했다고 한다. 그 한국 교수가 아들에게 일독을 권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덕분에 민주화 운동에 참여했던 청년에게 일본어판 〈그대들, 어떻게 살 것인가〉가 전달된 모양이었다.
“유족 입장에서는 양해도 없이 책을 번역 및 출간한 것에 대해 화가 나실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제발 이 출판을 허락해주시고 축복해주시면 좋겠습니다. 주체적으로 이 책을 번역하고 출판한, 민주화 운동에 임했던 한 청년의 견문과 학식에 저는 무척 감복했습니다. 제가 그를 대신해 용서를 구하겠습니다.” 편지는 이렇게 마무리됐다.
편지를 읽고, 나는 그 도쿄대 교수에게 연락해 약속을 잡았다. 지금은 명예교수가 된 그는 내가 처음 보는 한국어 책을 건네주었다. 제목은 〈여러분은 어떻게 살 것입니까〉. 편지에서 언급된, 30여 년 전의 한국어 번역본이었다. 그 책은 정규 번역된 책과는 달리 1930년대의 도쿄를 1980년대의 서울로, 주인공 혼다 준이치 군을 ‘김종철’ 군으로 바꿔 이야기를 전개했다. 일본인인 혼다 준이치 군이 긴자나 간다 등 일본식 이름의 거리를 돌아다니는 내용을 한국어로 읽었을 때는 외국 문학 특유의 낯선 감각이 일었는데, 김종철 군이 명동의 거리를 돌아다니는 이야기를 한국어로 읽자 훨씬 와닿는 느낌이 들었다.
교수님의 이야기를 듣고 가슴이 뭉클해졌다. 우리 할아버지와 그 책을 낸 이의 삶이 겹쳐 보였기 때문이다. 군국주의가 심해지던 시기에 사상범으로 투옥된 후 실업 상태에서 겨우 소년 문학을 내고, 전쟁이 끝난 뒤 민주주의의 가치를 역설하기 위해 월간지를 창간한 우리 할아버지. 서슬 퍼런 독재정권 아래에서 민주화 운동에 힘쓰다 투옥되고, 군사정부가 막을 내린 이후 출판사를 만들어 책을 낸 그 사람. 그런 이가 처음으로 낸 책이 우리 할아버지의 책이었다니. 도대체 이게 무슨 인연일까. 번역자 후기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외세에 의한 분단 상황 아래서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겐 사물을 객관적으로 바라보거나 진보적인 역사 인식을 표현하는 것이 철저하게 금지되고 있다. 획일적 사고를 강요당하는 상황에서 이런 시대적 배경의 차이가 이 책이 갖는 의의를 떨어뜨리지 않으리라.” 군사독재 정권의 언론 탄압에서 벗어난 지 얼마 되지 않은 한국 사회에 어떻게든 책의 의미를 전달하고자 한 고민과 열정이 느껴졌다. “그런 점들을 생각하면 ‘김종철’이라는 이름에서 1987년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고문을 받다 사망한 박종철의 이름이 떠오르는 것도 무리는 아니겠네요.” 〈에스콰이어〉의 피처 디렉터는 이런 말을 덧붙이기도 했다.
30여 년이 지났기에, ‘무허가 번역’이니 ‘해적판’이니 하는 것은 이제 아무런 상관이 없다. 오히려 감사한 마음이었다. 인사를 전하고 싶어 도쿄대 교수를 통해 연락처를 받았지만, 그는 끝내 전화를 받지 않았다. 혹시 저작권료를 요구할까 염려했을지도 모르겠다.
연락이 닿지는 않았으나, 어쨌든 신기하고 기막힌 인연임은 분명했다. 혹시 그날 내가 부모님 집을 방문하지 않았더라면, 또는 할아버지의 편지를 정리하지 않았더라면, 내가 한국 유학 경험이 없어 한국어를 읽지 못했더라면… 아주 약간의 사실 관계만 달라졌더라도 나는 1980년대에 할아버지의 책이 한국에서 출간됐다는 사실과 여기에 얽힌 사연, 그 배경을 알 수 없었을 것이다. 이것 역시 하늘에 계신 할아버지가 전해준 선물일지도 모른다.
미야자키 감독의 신작이 일본에서 개봉한 뒤, 한국에서도 꽤 화제가 되었다고 들었다. 덕분에 할아버지의 책 〈그대들, 어떻게 살 것인가〉가 한국의 서점에서도 돌연 판매량이 늘었다는 소식도 접했다. 놀랍기도 하고, 감사하기도 했다. 그 와중에 또 한 가지 반가운 이야기를 들었다. 〈그대들, 어떻게 살 것인가〉가 올해 중 한국에서 개봉을 확정했다는 것이다. 소설 〈그대들, 어떻게 살 것인가〉를 통해 한국의 많은 분들 역시 우리 할아버지의 삶에 대해, 그리고 1937년의 책과 2023년의 애니메이션 영화, 그리고 1988년 한국에서 일어난 우연하지 않은 인연에 대해 조금이라도 관심을 갖게 된다면 더할 나위 없이 기쁜 일이 될 것이다. 아마 하늘에 계신 할아버지 역시 그런 마음일 거라고, 감히 생각해본다.
Who's the writer?
요시노 다이치로는 20세기 일본을 대표하는 지식인 요시노 겐자부로의 손자다. 1997년 〈아사히 신문〉에 입사해 국제부와 사회부에서 기자로 일했으며, 현재는 아사히신문사 산하의 라이프스타일 인터넷 매체 ‘Kosho-Kojitsu’의 부편집장이다.
EDITOR 김현유 WRITER 요시노 다이치로 PHOTO 요시노 다이치로/스튜디오 지브리 ART DESIGNER 주정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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